<XPRIZE 우주여행의 시작>
피터는 해밀턴 대학(Hamilton College) 기숙사에 홀로 앉아 있었다. 뉴욕주 클린턴에 있는 해밀턴 대학은 학생 수 1,800명의 뉴잉글랜드 풍 리버럴아츠 칼리지로, 그레이트넥에 있는 피터네 집에서 북쪽으로 거의 다섯 시간 거리에 있었다. 학교 캠퍼스는 아름다웠지만, 이곳에서 생활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피터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우주와 화학, 로켓공학에 대한 열정은 더 커졌지만, 자신은 우주인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의과대 진학과정 학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주인과 의사의 길을 동시에 이루겠다며 생물학과 물리학을 복수로 전공하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대학은 우주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은 고사하고, 과학 분야의 복수전공도 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피터가 해밀턴 대학에 간 이유는 자신이 아이비리그에 지원할 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아이비리그로 진학했다. 의과대 진학과정을 지망한 것은 부모님을 생각해서였다. 지금까지 제멋대로 지내던 소년이 이제 그럴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피터는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쓴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점점 갈수록 해밀턴 대학에 대해 품고 있던 내 기대가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입학하기 전에는 진로 선택의 폭이 넓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생화학을 전공해보려고 한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내용도 있었다. ‘해밀턴에서 맞닥뜨린 이 역설적인 상황이 몹시 괴롭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 좋겠다.) 우선 이곳 수업을 따라가기가 아주 힘들다고 한다. 여기보다 ‘좋은’ 크고 유명한 대학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대학원 진학이라는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그런 사실을 알아줄지 모르겠다.’
피터는 추수감사절 연휴에 그레이트넥에 있는 집에 갔다가 MIT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 마이클 노벰버(Michael November)를 만났다. 두 사람은 피터네 집 근처에 있는 쉘터베이 테니스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이클은 고등학교 다닐 때 화학 AP(대학과목 선이수제) 수업을 듣던 친구였다. 차고 건조한 늦가을 공기를 마시며 테니스를 치던 피터는 마이클에게 과학과 기술 공부에 갈증을 느낀다고 말했다. 해밀턴 대학에서 외부 교수를 초빙해 과학을 주제로 한 강연을 열 때마다 앞줄 가운데 앉아 필기를 해 가며 강연에 집중한다는 말도 했다. “씹어 먹을 정도로 열심히 듣지. 철학이나 문학도 멋지지만, 그보다 더 많은 걸 배웠으면 좋겠어.”
고교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던 마이클은 피터가 우주에 빠졌듯이 수학에 빠진 학생이었다. 마이클의 학교 얘기는 피터와 정반대였다. 테니스시합 중간중간 마이클은 MIT의 UROP(Undergraduate Research Opportunities Program) 이야기를 했다. UROP는 학부생에게 원자력 과학, 도시 계획, 주택용 태양광 발전 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마이클은 현재 소형 토카막 제작을 포함한 핵융합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토카막은 고리 모양의 금속 튜브 내부를 진공 상태로 만든 후자기장을 이용해 플라스마를 가두는 장치다. 프로젝트 리더는 MIT의 전기 및 컴퓨터 공학과를 개설하는 데 기여한 루이스 스멀린(Louis Smullin) 교수라고 했다. 스멀린 교수는 1940년대 초에 방사선 연구소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항공기 탑재 레이더 개발을 주도했었다.
피터는 테니스를 치다 말고 멈추어 섰다. 대학교 1학년생이 핵융합 실험을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다니!”
마이클은 학교의 원자력 실험실을 책임지고 있는 제롬 프리드먼(Jerome Friedman) 교수의 상대성 이론 수업도 듣고 있다고 했다. 물리학은 헨리 켄들(Henry Kendall) 교수한테 배우고 있었는데, 켄들 교수는 프리드먼 교수와 함께 쿼크(quark)라는 소립자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 중이라고 했다. 테니스 시합이 끝날 때쯤 피터 머릿속에는 MIT가 각인되었다. 남은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은 차를 손보면서 보냈다. V8 엔진을 단 폰티악(Pontiac)의 트랜스 앰(Trans Am)으로, 후드에 황금색 불새가 그려진 차였다. 공기를 더 많이 빨아들일 수 있도록 기화기 흡기 매니폴드를 개조했다. 그러면서 질소 분사 시스템을 장착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추수감사절 연휴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피터는 편입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MIT에 전화를 걸었다. 학교 측의 설명을 듣고 기분이 들뜬 피터는 1월 초에 MIT 면접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편입 신청서는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피터는 과연 자신에게 면접 기회나 돌아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MIT는 세계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대학일 뿐 아니라 편입은 더욱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피터는 그때까지 해밀턴 대학에서 최대한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학교 밖에서도 과학과 우주 분야를 배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일단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두세 번 모이는 생물학 스터디그룹을 시작했다. 또, 우주 분야의 교수나 우주에 관한 글을 쓴 가까이에 살고 있는 작가를 찾아 나섰다. 나사에도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중 한 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배우고자 하는 분야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생인데, 나중에 우주 프로그램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먼저 대학원에 진학해 의학 학위부터 딸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생화학 공학박사 학위도 함께 딸 계획입니다. 나사에서 혹시 저한테 도움이 될 만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주 프로그램이나 우주인 훈련 프로그램 등에 합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신청서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피터 H. 디아만디스 드림
드디어 1월이 되자 피터는 어머니와 함께 보스턴으로 차를 몰았다. 모자는 찰스 강을 가로질러 케임브리지에 있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으로 향했다. 매사추세츠가를 따라 걷던 두 사람은 하버드 다리를 건너 낡은 계단을 오른 후,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기둥을 지나 매사추세츠가 77번 건물 입구에 들어섰다. 캠퍼스 중심에 위치한 돔 형 대리석 건물이었다. 피터는 돔 아래 그리스어로 새겨진 글자부터 눈앞에 길게 뻗은 복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 사람 뒤편에 있는 긴 유리창으로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따사로운 빛이 대리석 로비를 가득 채웠다. 두툼한 외투를 뒤집어쓴 학생들이 책을 들거나 배낭을 메고 지나다녔다.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로비는 250미터 길이의 복도로 이어져 있었고, 복도를 지나면 캠퍼스의 다른 곳으로 연결되었다. 멋진 건축물을 좋아하는 어머니 툴라는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볼 때처럼 숨이 막힐 듯한 감동을 느꼈다. 피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어쩌면 어머니가 그레이트넥에 있는 집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느낌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버지가 세상에 막 눈을 뜬 예쁜 외출복을 입은 어머니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피터는 어머니와 함께 긴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알림판이나 진열장 안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알림 쪽지를 살펴보았다. 마이클 노벰버가 자랑하던 학부생 연구 기회 프로그램인 UROP 포스터도 있었다. 지나가던 학생 하나가 ‘MIT 헨지(Henge)’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마다 1월 하순 며칠 동안 해가 기울 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했다. 기우는 해가 킬리안 코트 북쪽 끝에 있는 건물 몇 동과 일직선을 이루며 햇빛이 7번 건물 복도를 지나 8번 건물 복도까지 비추는데, 3층에서 보면 가장 잘 보인다는 것이었다.
‘끝없는 복도(Infinite Corridor)’로 알려진 이 복도는 3, 4, 7, 8, 10번 건물로 연결되었다. MIT는 모든 것이 숫자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학생이나 강의, 건물 모두 번호가 부여되었다. 강의실 문에 달린 불투명한 크림색 유리에는 학과와 교수 이름이 까만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니 어릴 적 탐정 영화에서 보던 문이 생각났다. 생각 같아서는 문마다 다 열고 들어가 강의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피터는 평소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그저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두 사람은 10번 건물과 11번 건물을 지나 물리학과가 있는 8번 건물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MIT 설립자인 윌리엄 바턴 로저스(William Barton Rogers)가 19세기에 개설한 이 학과는 교수진과 졸업생 중에서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와 물리학계의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양자 전기역학),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소립자), 새뮤얼 팅(Samuel Ting)과 버튼 리히터(Burton Richter, 아원자 입자),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 페어차일드 반도체 및 인텔 근무), 빌 쇼클리(Bill Shockley,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 조지 스무트(George Smoot, 우주배경복사), 필립 모리슨(Philip Morrison,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과학 교육자) 등을 들 수 있다. 스푸트니크호 발사와 아폴로 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MIT의 물리학 수업은 수많은 학생으로 넘쳐났다.
피터와 어머니는 생물학과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MIT에 편입한다 해도 의과대 진학과정에 계속 다니겠다고 부모님과 합의가 되어 있었다. 이곳 생물학과는 배울 수 있는 선택의 폭이 훨씬 넓었다. 두 사람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복도에 붙어 있는 사진이나 포스터, 각종 행사와 클럽의 알림 쪽지 등을 살펴보았다. 살사 댄싱부터 별자리 관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붙어 있었다. 피터는 떠나기 전에 꼭 보고 싶은 학과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37번 건물에 있는 항공물리학과였다. 항공 물리학은 생동하는 색이나 패턴 또는 우주의 구성 등을 말과 방정식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실재와 비실재가 섞인 학문이다.
모자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항공우주공학과가 있는 33번 건물이었다. 사관학교를 빼면 그 어떤 곳보다도 우주인을 많이 배출한 곳이었다. 1,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인들도 이곳에서 항공 훈련을 받았었다. 초음속 비행 시험의 돌파구를 연 곳도 이곳이었다. 버즈 올드린은 1963년 여기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폴로 13호의 짐 러벌(Jim Lovell)이나 아폴로 14호의 에드 미첼(Ed Mitchell) 등 다른 우주인들도 MIT에서 우주비행 안내 강의를 들었다.
‘찰스 스타크 ‘독’ 드레이퍼(Charles Stark ‘ Doc’ Draper)는 1920년대에 MIT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930년대에 계측기계 연구소(Instrumentation Laboratory, 지금의 드레이퍼 연구소)를 설립했다.’ 학과의 연혁을 살펴보던 피터는 깜짝 놀랐다. 아폴로호에서 쓰던 관성유도장치(인류를 달에 보낸 컴퓨터)가 계측기계 연구소에서 개발되었다니.
‘바로 여기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니!’ 관성유도장치가 세상에 나올 때만 해도 컴퓨터 한 대가 온 방을 차지했고, 잉크 리본이 달린 타자기가 주를 이루었으며, 흑백 TV를 보던 시절이었다. MIT에 꾸려진 작은 팀에서 새로운 기술인 집적회로를 이용해, 인간과 기계를 달까지 보냈다가 돌아오게 하는 방안을 궁리해낸 것이었다. 야구팬에겐 리글리 필드(Wrigley Field), 골퍼에겐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s), 서퍼에겐 매버릭스(Mavericks), 산악인에겐 K2가 성지이듯, 피터에게는 이곳이 성지가 되어 버렸다.
피터는 계측기계 연구소에서 만든 화성 탐사선의 부품을 비롯해 우주개발의 자취를 살펴보았다. 1960년 초 제작된 탐사선은 발사되지 못했지만, 그 기술은 계속 발전해 아폴로호의 유도 컴퓨터를 탄생시켰다. MIT는 처음으로 나사로부터 아폴로호에 쓸 유도 컴퓨터 개발 계약을 따냈다. 케네디 대통령이 저 유명한 연설을 하고 몇 달이 지난 후였다. 새로 설립된 나사의 책임자인 짐 웹(Jim Webb)은 기술자이자 관성유도장치를 개발한 드레이퍼 박사를 잘 알고 있었다. 드레이퍼 박사는 자신이 만든 비행기 부품을 시험하기 위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기도 했었다. 드레이퍼 박사에 따르면 웹 국장이 자기한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사님, 아폴로호에 쓸 유도항법장치를 개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드레이퍼 박사의 대답이었다.
“언제쯤이면 개발이 되겠습니까?”
“필요하실 때쯤이요.”
“제대로 작동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직접 타고 시험해보도록 하지요.” 드레이퍼 박사는 예순 살의 나이에 공식적으로 우주 비행사가 되겠다고 자원했다.
드레이퍼 박사는 자기 팀에서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아무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박사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기술적 도전일 수도 있는 그 일을 하겠다며 주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자신과 자신의 팀을 믿었다. 연구소 안을 살피던 피터가 이번에는 또 다른 우상 베르너폰 브라운에 관련된 이야기를 보고 노트에 적었다. 아폴로 프로그램 초
기에 폰 브라운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소련과 협력하면 훨씬 낫지 않을까요?” 폰 브라운은 “만약 소련과 협력한다면, 그 어느 쪽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피터는 ‘경쟁이 있었기에 미국이 달에 갈 수 있었다’라고 노트에 적었다.
어머니와 함께 늦은 오후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걸어가던 피터의 마음속에는 그날 하루에 보았던 수업 과목이며 학과, 혁신적인 기술 등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장소였다.
MIT를 둘러보고 해밀턴 대학으로 다시 돌아온 피터는 공연히 안달이 났다. MIT를 보고 나니 나사가 대담했다는 생각과 함께 10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나사가 이룬 업적이 다시 떠올랐다. 영광스러웠던 그 시절이 다시 오기를 바랐다. 1970년대는 여러 면에서 1960년대와 정반대였다. 자본은 베트남 전쟁과 수많은 사회 문제에 투입되었다.
1960년대 나사의 예산은 미국 연방 예산의 1퍼센트가량 되었다. 도급업체 직원과 내부 직원을 합한 숫자는 나사가 한창때인 1965년에 4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다 1979년경에는 연방 예산 대비 나사 예산의 비율이 반으로 줄어들었고, 직원 수도 2만 명으로 줄었다. 나사는 저 유명한 핼리혜성 가까이 우주선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취소했다. 핼리혜성은 1986년 지구 근처를 지나 75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폴로 18호, 19호, 20호의 발사도 취소하였다. 이미 부품을 구매하고 선체를 만드는 등 준비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달에 사람을 보낸 후, 정부가 ‘우주에다 돈을 쏟아붓는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우주왕복선의 설계와 개발은 연기되었고, 지구 저궤도에 우주 정거장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끝이 났다.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였다. 그들의 꿈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피터는 우주계획을 지지하는 청원서를 작성한 후 교내에 회람을 돌려 서명을 받았다. 그런 다음 지방의회 의원부터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의 우주문제 고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알아낸 모든 선출직 지도자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피터는 ‘미국 우주 프로그램의 목표와 예산이 속도는 느리지만, 줄어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피터는 해밀턴 대학학생과 교수를 합해 모두 200명가량의 서명을 받았다. 전체 학생 수가 1,800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피터는 또 과학잡지 《옴니(Omni)》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실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학생 여러분, 읽어 보십시오. 갈릴레오 계획과 핼리혜성/템펠2 혜성 계획이 모두 취소되었고, 당혹스럽게도 우주왕복선 계획마저 연기되었습니다. 정부는 우주계획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미래인 우주계획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이 문제를 제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에 우리 입장을 알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청원을 시작하십시오. 청원서에 서명을 받아 대통령과 의원들에게 보내면 됩니다. 미국에는 1,000여 개에 이르는 대학이 있고, 학교당 평균 학생수는 2,000명가량 됩니다. 우리 세력은 막강하므로 우리 손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피터 H. 디아만디스
뉴욕 주 그레이트넥
1980년 2월 초 해밀턴 대학은 짐 아널드(Jim Arnold) 교수를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아널드는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캠퍼스에 화학과를 개설한 교수로, 나사 자문위원이며 달에서 가져온 암석과 토양을 최초로 조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널드 교수는 달이나 지구와 인접한 소행성에 채굴할 만한 유용한 자원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행성에서 니켈, 철, 백금과 같은 금속을 채굴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피터는 방문학생 두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미래 국제학교’라는 곳에서 왔다고 하면서, ‘초소형 우주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피터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방문학생이 준 명함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멋진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밀턴 대학에서 이런 강연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MIT로부터 소식을 들으려면 적어도 6주는 기다려야 했다.
프랭크 프라이스(Frank Price) 교수가 가르치는 생물학개론은 해밀턴 대학 의과대 진학과정 학생들에게 필수 과목이었다. 이 강의는 어려워서 의과대 진학과정에 계속 남을 학생을 추려내는 강의라는 평판을 얻었다. 돼지 태아를 해부하고 살펴보는 것이 학점의 50퍼센트를 차지했다.
학생은 80명가량 되었고, 일주일에 강의 세 시간과 실습 세 시간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 첫날, 해밀턴 대학에서 5년째 생물학을 가르치고 있던 프라이스 교수는 돼지 태아를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돼지가 실험실 밖으로 반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두 사람당 돼지 한 마리가 배분된다고 했다. 생리현상과 장기의 기능을 알아보고, 심장과 허파, 위, 간의 혈액 순환 패턴을 살펴보는 것이 강의의 초점이었다.
피터는 아주 중요한 해부 시험을 2주 앞두고 수두에 걸려 학교 의무실에서 한 주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 꼭 참석했어야 할 실습 시간과 모의시험을 빼먹게 되었다. 해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면, 일류 의과대학에 갈 기회가 사라질 뿐 아니라 MIT에도 갈 수 없게 될 터였다. 이 시험을 망칠 수는 없었다.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피터는 궁리 끝에 한 가지 꾀를 냈다. 돼지 태아를 잠시 ‘빌려’ 주말에 공부하는 것이었다. 실험 파트너인 필립(Philip)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필립은 같은 기숙사에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실습이 끝난 후 피터가 책가방을 벌린 채 들고 있으면 필립이 돼지를 슬쩍 가방 안으로 밀어 넣기로 하였다.
월요일 수업시간이 되자 프라이스 교수가 학생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난주에 돼지 한 마리를 훔쳐 간 학생이 있네. 누가 그랬든 솔직히 자수했으면 좋겠네. 또,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아는 학생이 있다면 말해주기 바라네. 그게 학교의 명예규칙에 따른 여러분의 의무일세.”
피터가 뒤를 돌아보니 겁에 질린 필립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밀턴 대학에서는 입학할 때 모든 학생이 엄격한 명예규칙에 서명하게 되어 있었다. 학사 도중에 불명예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퇴학을 당하거나 수강과목이 자동으로 미이수 처리된다고 하였다. 30센티미터가량 되는 돼지 태아는 포름알데히드에 적신 종이에 싸인 채 비닐봉지에 담겨 기숙사 냉장고 구석에 감춰져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온 피터에게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룸메이트가 프라이스 교수에게 고자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피터는 룸메이트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테니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공황 상태에 빠지다시피 한 피터는 필립을 자기 방으로 불러 상의한 뒤 증거를 없애기로 뜻을 모았다. 두 사람은 쓰레기통이나 후미진 곳 등 캠퍼스 구석구석을 다니며 돼지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곳을 찾아보았다. 그날 밤 피터와 필립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해밀턴 대학이 있는 곳은 수백 에이커의 삼림지대로 둘러싸인 시골이었다. 두 사람은 돼지를 땅에 묻은 후 묻은 장소에 표시를 해두었다. 피터 머릿속엔 자신이 퇴학당할 것이고, 가족들은 망신스럽게 여길 것이며, MIT에 절대 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몸도 더 아팠다.
피터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 해리와 어머니 툴라는 친구집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중이었다. 해리는 개인적인 통화라며 양해를 구하고 나간 뒤 한 시간이 넘어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툴라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지만, 해리는 잘 해결되었다는 말만 했다. 피터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처한 상황을 설명한 뒤 다음날 교수를 찾아가 스스로 밝히겠다는 말을 했다.
해리 디아만디스는 아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해리가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의무실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해리는 아들이 아파서 입원했을 때 아들을 보러학교에 갔다가 학교 의사를 만나보고 친절하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아들에게 의사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라고 했다. 의사가 먼저 프라이스 교수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나면, 피터가 돼지를 들고 실험실로 가서 교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했다.
피터는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돼지를 파냈다. 그러고는 오후 늦게 실험실로 프라이스 교수를 찾아갔다. 가방에서 돼지를 꺼내는 손이 떨렸다. 핏기없는 얼굴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이 프라이스 교수 눈에 들어왔다. 그전에도 돼지를 훔쳐 간 학생들이 있었다. 그 학생들은 돼지 목에 밧줄을 매고 기숙사에 걸어 두거나 침대나 욕실에서 돼지에게 못된 장난을 쳤었다. 이미 의무실 의사에게 들어 내용을 알고 있던 프라이스 교수가 피터에게 말했다.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는가?” 고개를 끄덕인 피터가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더듬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교수님.” 피터가 교수를 쳐다보았다. ‘내 인생은 이대로 끝인가, 아니면 용서를 받을 것인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시간이 피터에게는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프라이스 교수가 말했다. “그럼, 시험이나 잘 보게.”
몇 주 후 피터는 MIT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읽던 피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피터 군, 입학위원회를 대표해 귀하를 MIT에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프라이스 교수는 피터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며, 피터가 평생 잊지 못할 배려와 관용이라는 가르침을 함께 주었다. 앞으로 편법이나 규칙 위반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MIT에 가는 것은 큰 선물이었다. ‘끝없는 복도’로 다시 돌아가 강의실 문도 열어 보고 클럽에도 가입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만의 무언가를 시작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