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우주의 피트

<XPRIZE 우주여행의 시작>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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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180년 가을, 피터는 ‘우주의 피트(Pete in Space)’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피터가 가입한 남학생 클럽 ‘세타델타치(Theta Delta Chi)’ 회원들은 우주의 피트를 줄여서 PIS라고 부르며, ‘우주생도’, ‘우주로 사라지다’ 등의 말을 만들어 장난을 쳤다. 피터는 친구들의 장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PIS라는 서명까지 쓰기 시작했다. 피터는 MIT 생활이 정말 즐거웠다.

피터는 MIT에서 공부하며 분자생물학, 물리학, 컴퓨터공학, 전기공학, 천체물리학, 항공학, 우주항공학 등의 분야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고 점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새로 옮긴 학교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끝없는 복도’를 걸어가며 벽에 붙은 알림 쪽지나 포스터를 보다가 뭔가 하나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주와 관련된 동아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MIT에 학생 우주 동아리가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피터는 학내활동 담당 교직원을 찾아가 우주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동아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컴퓨터 동아리와 천문학 동아리는 있지만 우주 동아리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아리를 만들고 싶으면 네 사람의 서명과 동아리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피터는 남학생 클럽 회원과 또 다른 친구의 서명을 받은 뒤 동아리 이름 후보 명부를 작성했다. ‘우주 탐사 및 개발을 추구하는 학생들(SEDS: Students for the Exploration and Development of Space)’로 부르기로 했다. 피터가 만들려는 동아리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피터는 전단 200장을 만들어 캠퍼스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끝없는 복도’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복도 벽에 판박이 글자 세트를 이용해 블록체로 SEDS를 새겨 넣은 다음 그 아래 굵은 펜으로 이렇게 썼다. ‘우주에서의 당신 미래에 관심이 있다면, 학생회관으로 와서 우리 동아리에 가입하세요.’

이제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피터는 벌써, 아주 힘든 학업과 학부생 연구 프로젝트 2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하나는 우주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과대 진학과정 프로젝트였다. 그 덕분에 실험실에서 밤늦게까지 작업하느라 새벽 세 시나 되어서야 남학생 클럽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이 많았다. 그레이엄 워커(Graham Walker)교수의 유전자 연구소에서 수행하던 의과대 진학과정 프로젝트는, 대장균에 있는 PKM-101 플라스미드의 불안정성에 관한 연구였다. 우주를 향한 열정을 채우기 위해 수행하는 다른 프로젝트는, 37번 건물에 있는 ‘인간 운송수단 연구소(MVL: Man Vehicle Laboratory)’에서 따낸 UROP 프로젝트였다. 항공우주공학과에서 운영하는 이 연구소는 1층에 있었는데 창문이 없었다. 내부 디자인이나 캐비닛, 연구소 바닥, 심지어 일부 장비까지 마치 반세기 전의 것처럼 보였다. 피터는 그 모습을 보고 아폴로 우주선을 발사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MVL에서 피터가 하는 일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피터는 그 일을 좋아했다. MVL의 중점 연구 대상은 비행기나 우주선을 탄 사람들의 생리적, 인지적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 1962년에 설립된 이 연구소는 아폴로 계획 초기에 나사와 긴밀히 협력하며 우주인의 우주멀미에 관하여 연구했었다. 지금은 나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또 다른 유형의 우주인인 ‘탑승 실험 전문가(payload specialist)’에 관하여 연구하는 중이었다. 탑승 실험 전문가란 우주왕복선을 타고 우주에서 실험을 수행하는 훈련을 받은 과학자를 말한다. 피터는 우주멀미가 일어날 때 위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하는 위전도 측정기를 설계하고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2학기에는 우주멀미 증상 중 하나인 안구진탕증이라는, 비자발적 안구 운동을 추적하는 실험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작업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피터는 우주인과 1대1로 작업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미래의 우주왕복선 비행에 대비해 나사에 우주인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소문과 우주 정거장을 만들 계획이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피터는 공식적으로는 의사 지망생이었지만, 열정으로 보면 우주인 지망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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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DS의 첫 모임이 계획된 수요일 저녁, 피터는 스트래턴 학생회관(Stratton Student Center) 2층에 마련된 방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 가입 서명한 사람이 다섯 명밖에 되지 않아 아무도 오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피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나가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몇몇 학생이 마치 들어올 것처럼 잠시 멈추더니 그냥 지나가 버렸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고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버릇이었다. 몇 분 지나자 학생 몇 명이 들어왔다. 조금 있다가 다시 몇 명이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모두 30명가량 모여들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피터는 인사말과 함께 자기소개를 했다. <스타트렉>, <스타워즈(Star Wars)>, 아폴로 등 ‘우주에 관해서는 다 섭렵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다음 왜 지금 이 시점에 학생 우주 동아리가 필요한지를 역설했다.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관련된 일입니다. 근시안적인 정치인들 손에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습니다. 우주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피터는 1960년대에 활기를 띠던 아폴로 계획의 기세가, 그때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아폴로 17호를 발사하던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보이저(Voyager) 탐사선은 성간우주에 다다랐고, 새턴-V 로켓을 개조해 발사한 우주 정거장 스카이랩(Skylab)은 처음으로 우주 정거장 기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진행 속도가 점점 떨어져 우주왕복선은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예산을 초과하였다. (‘날지 못하는 90억 달러짜리 우주선’이라 불릴 정도였다.) ‘나사는 인간을 달이나 그 너머로 보낼 새로운 계획이 없다.’ ‘우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어 버렸다.’ 이렇게 말한 피터는 각종 무선기기, 항법장치에 쓰이는 소형 집적회로, 몸에 삽입할 수 있는 심장박동 조절기, 냉동건조식품 등 우주계획에서 파생된 기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피터가 자신의 열정에 스스로 놀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동아리의 목표는 우주계획을 강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정부와 기업체 및 일반 대중에게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SEDS를 전국적인 우주 관련 단체 L5의 하부 단체로 편입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질문한 학생이 있었다. L5는 프린스턴대학 물리학자 게리 오닐(Gerry O’neill) 박사의 구상에 따라 만들어진 단체였다. 《우주 정착지(The High Frontier)》의 저자이며 ‘우주 연구소(Space Studies Institute)’의 설립자이기도 한 오닐 박사는, 지구와 달 사이에 있는 중력 최적지대인 L5에 인구 만 명이 살 수 있는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었다. 지구에서 350,000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는 우주선이 정지 상태로 머물 수 있다. 피터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동아리는 학생을 위해 학생이 운영하는 단체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뒤편에 있던 남학생이 손을 들더니 자신을 에릭 드렉슬러(Eric Drexler)라고 소개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피터는 학생이 주도하는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도 우리가 L5 밑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드렉슬러는 프린스턴대학에서 2년 동안 오닐 박사를 도와 대용량 발사 장치(mass driver)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었다. 대용량 발사 장치는 달에 있는 물질을 쏘아 보내는, 대포같이 생긴 전자기력 장비다. 드렉슬러는 고성능 ‘솔라 세일’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MIT에서 항공공학 석사 학위를 받고, 분자 나노기술이라는 혁신적인 분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린스턴과 예일에서 SEDS 지부를 설립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고등학교 동창 스콧 샤프먼(Scott Scharfman)이 프린스턴 지부를 만들었고, 또 다른 동창 리처드 소킨(Richard Sorkin)이 예일 지부를 설립했다. 피터는 스콧, 리처드와 함께 네 쪽짜리 동아리 회칙을 작성했다. 또, 대통령 당선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미 의회를 향해 ‘태양열 발전 위성 연구 기금’ 마련을 촉구하는 청원 운동을 시작했다. 우주왕복선이 들어간 동아리 로고도 만들었다. 그리고 순수과학과 의사과학을 함께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잡지 《옴니》에 글을 보냈다. 정성 들여 작성한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주계획과 관련한 정부의 목표와 예산이 갈수록 열악해져 우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므로,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이 힘을 합쳐 조직적인 대응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은 각자의 학교에 동아리 지부를 설립하여 우리 뜻에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SEDS 국제본부 주소는 피터의 남학생 클럽이 있는 메모리얼 드라이브 372번가였다.

피터의 글은 1981년 4월호 《옴니》에 게재되었다. 같은 달 드디어 STS-1(Space Transportation System-1, 첫 번째 우주왕복선의 임무),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발사되어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미국민의 자긍심을 회복시켰다. 네 번으로 계획되어 있는 우주왕복선 궤도 시험비행 중 첫 번째로, 로켓처럼 쏘아 올려져 우주선처럼 궤도를 돈 다음 글라이더처럼 지구로 되돌아올 예정이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재사용할 수 있는 유인 우주선이었고, 미국 우주인 탄생은 거의 6년 만의 일이었다.

수천 명에 이르는 구경꾼이, 인디언 강을 사이에 두고 케네디 우주센터 건너편에 있는 해변으로 모여들었다. 카운트다운이 마지막에 이르자 관중이 “발사, 발사, 발사!”라고 외쳤다. 컬럼비아호가 하늘로 솟아오르자 관중은 환호하고 소리 지르고 기도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남학생 클럽 기숙사로 돌아오던 피터는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기숙사 현관에 있는 수십 개의 목제 우편함의 자기 자리에만 넘칠 정도로 편지가 꽂혀 있었다. 두꺼운 카드한 벌을 꽂아 놓은 것처럼 수북이 쌓인 편지 중 몇 통은 제멋대로 삐져나와 있었다. ‘누가 장난을 쳤나?’ 피터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 봉투를 살펴보니 글씨체나 우표, 소인이 다 달랐다. 피터는 현관에 앉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뭄바이에서 편지를 보낸 학생은 SEDS 지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의 여학생도 피닉스에 지부를 설립해 같은 생각을 하는 학생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텍사스 주 러벅에서 편지를 보낸 남학생은, ‘만약 미국 정부가 파산하면’ 우주에 가서 살기 위해 ‘식민지 생태계와 대용량 발사 장치 등’에 관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토론토의 공학도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귀하의 글을 읽고 제가 받은 느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짜릿했다는 표현이 가장 가까울 것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우주계획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조직적인 목소리를 냈어야 했는데 많이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귀하의 계획을 읽고 나니 제 마음속에서 낙관적인 감정이 솟구칩니다.’ 그 학생은, SEDS의 목표는 미국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며 캐나다 지부의 일은 자신이 돕겠다고 나섰다.

그 후로도 편지는 계속 쏟아져 들어왔다. 남학생 클럽 회원들도 이 사실을 눈치챘다. 그후로 피터를 ‘PIS’라고 부를 때에는 그 말에 존경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 뒤 2년 동안 SEDS는 3개 대학 연합체에서 미국 및 전 세계에 100여 개 가까운 지부를 둔 학생 연합체로 성장했다. SEDS 회장이 된 피터는 인근 지부를 방문하기도 하고,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졸업 시험을 준비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SEDS 뉴스레터를 인쇄해 전 지부에 보내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5,000달러의 기금을 모금하면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모금 활동을 위한 모임은 친구나 교수진을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피터는 돈을 기부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아폴로호의 관성유도장치로 명성을 얻은 드레이퍼 박사가 설립한 드레이퍼 연구소 연구원을 대상으로 어렵사리 설명회가 이루어지자, 피터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는 최대한 열정적으로 모금 취지를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연구원들은, SEDS의 활동에는 깊이 공감하지만 드레이퍼 연구소가 비영리 기관이라 돈을 기부할 수 없다고 했다. 피터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연구소 문을 나서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피터가 돌아서서 이렇게 물었다. “혹시 뉴스레터를 드레이퍼 연구소에서 인쇄해줄 수는 없습니까?” 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피터가 다시 물었다. “저희 대신 저희 지부에 우편으로 보내주실 수도 있을까요?” 다시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피터는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하나 배웠다. 언제나 길은 있는 법이다.

피터는 학계나 나사, 또는 이름 있는 우주 관련 단체에서 저명한 인사를 초빙해 터프츠대, 하버드대, 보스턴대 등 근처에 있는 대학에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제1차 연례 국제 SEDS 콘퍼런스는 1982년 7월에 나흘 동안 열렸다. 나사의 한스 마크(Hans Mark) 부국장이 참석해 우주개발의 군사적 목적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그러다 피터가 빈에서 열리는 UN 우주 콘퍼런스에 초청받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콘퍼런스의 주제는 정부가 주도하지 않는 평화로운 우주개발이었다.

피터는 가장 싼 비행기 표를 찾아보았다. SEDS 캐나다 지부장 밥 리처드(Bob Richards)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갈 예정이었다. 밥은 피터가 《옴니》에 쓴 글을 읽고 피터에게 편지를 보냈던 토론토의 공학도였다. 당시 토론토에 SEDS 지부를 설립한 밥은 산업공학과 항공우주 분야의 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코넬대학에서 공부하며, 우주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칼 세이건(Carl Sagan)의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피터와 밥은 또 다른 학생 토드 홀리(Todd Hawley)와 서로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토드는 1982년 국제 SEDS 콘퍼런스가 개최되었던 조지워싱턴대학에 SEDS 지부를 설립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토드는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제학과 슬라브 어문학을 복수로 전공하고 있었다. 토드는 두 사람을 UN 비정부 우주개발 콘퍼런스의 회장인 데이비드 웹(David Webb)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피터와 밥과 토드는 비전뿐 아니라 풍기는 느낌까지 비슷해 때때로 한꺼번에 ‘피터밥토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세 사람은 키도 똑같았다. 피터는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깃털 모양의 검은 머리를 좌우로 늘어뜨렸고, 토드는 탁한 금발에 둥근 금속테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밥은 붉은빛이 도는 금발 곱슬머리에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토드는 우주가 차이점이 불식될 수 있는 곳이라 믿었다. 밥은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라 생각했고, 피터는 우주의 물리적 존재 및 모험에 관심을 가졌다.

피터와 밥은 아리스타 에어(Arista Air)라는 오스트리아 항공사를 통해 값싼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토드는 여자 친구 메리앤(MaryAnn)과 함께 따로 빈으로 향했다.

이튿날 피터와 밥은 토드와 매리앤을 만나 UN 콘퍼런스가 열리는 회장으로 향했다. 수십 개국의 국기가 펄럭이는 웅장한 건물 앞에 여러 대의 마차와 위성 송출 차량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피터는 ‘소비에트연방 모스크바’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위성 송출 차량의 사진을 찍었다. 피터가 참석한 세션은 ‘미래의 평화 중재자’, ‘원격 탐사 센터’, ‘우주를 통한 토지 이용 정보’ 등이었다. 피터는 레이건 대통령이 주창한 스타워즈 구상과 관련된 분야에서 근무하다 그만두었다는 과학자와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 계획이 너무 위험해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권을 도난당했다는 얘기와 KGB에 소속된 여자가 자기한테 접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빈에서의 둘째 날 아침, 피터와 밥과 토드는 로비에 서서 연사 명단을 살펴보았다. 세 사람은 그다음 날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다. 갑자기 밥이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다!” 토드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클라크의 대단한 위상을 모르고 있던 피터는 “그래서?”라고 답했다.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의 저자이며, 정지궤도 위성에 대한 개념의 창안자이자 ‘우주시대의 예언자’라고 알려진 미래학자였다.

밥과 토드가 클라크를 보고만 있자 피터가 말했다. “가서 말을 걸어보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밥과 토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피터는 일행과 함께 자기네 쪽으로 걸어오던 클라크 앞으로 향했다. 클라크 가까이 다가간 피터가 손을 내밀면서 밥과 토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는 SEDS 대표로 왔습니다. 혹시…….”

클라크가 그냥 지나쳤다. 피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피터의 경솔한 행동을 본 밥은 민망해했다. 사람들이 클라크의 강연을 들으려고 천천히 강당 안으로 몰려 들어가자 피터는 재빨리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클라크는 통신 산업의 미래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몇십 년 전 클라크는 《무선 세계(Wireless World)》에 유명한 논문을 실어, 지구 정지궤도를 정의하고 우주 위성을 이용해 통신을 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피터는 정지궤도 위성에 관한 클라크의 말에 흠뻑 빠져 꼭 한 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는 밥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분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 밥은 놀라 눈알만 굴렸다.

강연이 끝나자 피터가 다시 클라크 앞을 막아섰다.

“선생님, 저희는 ‘우주 탐사 및 개발을 추구하는 학생들’을 대표해서 왔습니다. 오늘 밤 선생님을 저녁 식사 자리에 모시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급히 자리를 뜨는 클라크에게 피터가 말했다. “저희 호텔 전화번호와 방 번호입니다. 저희가 하는 일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클라크는 세 청년을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의 영국 말투로 대답했다. “전화하겠네.”

그날 밤 피터와 밥, 토드는 인터콘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클라크를 만났다. 세 사람은 저녁을 먹으며 넋을 빼고 클라크의 이야기를 들었다. 클라크는 1940년대에 자신이 성장한 이야기, 통속 소설을 읽던 이야기, 행성 협회(Planetary Society)에서 일하던 초기 시절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또, 정지궤도 통신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클라크는 우주에서의 이해관계를 공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결속력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자신은 소련, 중국, 일본에서 우주계획에 종사하는 주요 로켓 과학자는 모두 만나 보았다고 했다. “모두 우주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그러면서 세 사람에게 언어, 국적, 정부, 이념을 가리지 말고 전 세계 모든 학생을 우주를 향한 공통의 열정으로 묶어 보라고 충고했다.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네.”

클라크는 세 사람 마음에 꼭 드는 구절을 인용했다.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 피터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앞으로 ‘아서 아저씨(Uncle Arthur)’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라는 대답과 함께 우주시대의 예언자, 아서 아저씨는 SEDS의 고문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MIT ‘인간 운송수단 연구소(MVL)’로 돌아온 피터는 척 오만(Chuck Oman) 교수를 도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얼굴에 접착식 전극 패치를 부착했다. 테스트 파일럿은 바이런 리히텐버그(Byron Lichtenberg)였는데, 베트남전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MIT에서 기계공학 및 생체공학을 전공한 새로운 유형의 우주인이었다.

1978년 탑승 실험 전문가로 선발된 리히텐버그는, 1년에 48번가량 우주왕복선을 타고 비행하며 과학 실험, 위성의 궤도 배치, 우주 정거장 건설 등의 작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우주왕복선은 애초 계획보다 세 배나 더 시간이 흐른 그때까지도 발사되지 않았고, 우주인들의 비행 횟수도 3분의 1로 줄어들 예정이었다. 이때가 1983년 겨울이었는데, 리히텐버그는 연말에 우주왕복선의 첫 번째 우주실험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탑승 실험 전문가의 핵심 연구 분야 중 하나는 우주멀미였다.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의 우주인들은 모두 강인함을 자처하는 전직 군 테스트 파일럿이라 우주멀미가 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세계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러시아의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은 우주멀미를 겪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지구 궤도를 17바퀴 돈 러시아의 두 번째 우주인 게르만 티토프(Gherman Titov)는 우주에서 토한 첫 번째 사람이 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아폴로 9호 우주인 러스티 슈바이카르트(Rusty Schweickart)는 궤도에 올라간 첫날 우주멀미를 겪었다고 했다. 버즈 올드린은 MVL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기는 지구로 돌아올 때 지독한 메스꺼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머리와 배에 전극을 붙인 리히텐버그를 빙빙 돌아가는 의자에 앉혔다. 그런 다음 머리를 반대쪽으로 움직이라고 하고는 멀미 증상이 시작 될 때까지 의자를 한쪽 방향으로 돌렸다. 피터와 담당 교수는 의자 옆에서서 각종 데이터 기록을 살펴보며 리히텐버그의 반응을 비교해보았다.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의문도 생겼다. 일단 멀미가 시작되면 완전히 회복하는 데 35분이 걸렸다. 리히텐버그는 MVL에서 만든 가속도계를 머리에 부착한 채 우주왕복선을 타고 날아가며 자기 몸 상태를 상세히 기록할 예정이었다. MVL의 목표는 ‘우주멀미를 샅샅이 밝히는 것’이었다. 연구소장인 래리 영(Larry Young) MIT 교수는, 처음으로 우주왕복선에 실려 우주로 쏘아 올려질 기밀실험실인 스페이스랩(Spacelab) 1의 승무원을 대상으로, 일련의 우주 실험을 수행할 책임자로 선정된 바 있다.

피터와 리히텐버그는 실험 도중 쉬는 시간에 우주인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피터는 우주인을 선발할 때 무슨 질문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미리 준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리히텐버그는 일반적으로 우주비행의 물리적인 내용과 기술적인 내용, 우주인이 되기 위한 훈련, 가정생활에 미칠 영향 등을 집중적으로 묻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조금 모호하면서 유치한 질문도 있다고 했다. “당신 혈액에 있는 적혈구의 평균 수명은 얼마나 되는가?”, “달 착륙이 속임수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외계인이 우주왕복선에 찾아와 우주인들과 함께 비행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

피터는 우주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질문을 퍼부었다. 리히텐 버그는, 우주인을 한 번 선발할 때 6,000명가량이 지원을 하는데 보통 그중 10명 정도가 뽑힌다고 하였다. 600대1의 비율이니 0.17퍼센트도 되지 않는 확률이었다. ‘운이 좋거나 정치적 배경이 있어야’ 뽑힐 수 있지만 심사 과정은 아주 까다롭다고 했다.

피터는 갑자기 망막에 작은 손상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그 이야기를 하였다. 미식축구를 하다가 무릎에 부딪혀 생긴 상처였다.

“그게 탈락 사유가 될까요?” 피터가 물었다.
“그럼. 선발 과정에 탈락 사유로 충분하지.”

피터는 갑자기 멍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사는 위험을 기피하는 조직이네. 좀 지랄 같지. 만약 자네가 선발된다 해도 우주로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네. 우주인 대부분이 펭귄이라 불리네. 날개는 있지만 날지 못한다는 뜻일세.”

피터는 자기 기억이 미치는 예전부터 우주인을 꿈꿔 왔다. 나사를 통해 우주에 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을까?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정부의 도움 없이 우주에 가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때 거의 5,0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캘리포니아 사막 한가운데서 정부 주도의 계획에 환멸을 느낀 비행기 설계자 한 사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 군에서 제시하는 최대치만큼 왕복 비행할 수 있는 저공비행 항공기를 개발하는 중이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꿈에 젖어 사는 이 사람도 피터처럼 언젠가는 별에 가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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