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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02. 2018

04. 교사는 전달자일 뿐이다.

<고전 읽는 가족>



공자는 『논어』 술이편(述而篇)에서 모든 부모, 모든 교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원리를 알려주었다. 익숙한 구절이었지만 내 상황이 달라지자 의미와 무게가 달랐다.

“옛것을 전해줄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인생을 산다.”(述而不作 信而好古)

교사는 새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꿰뚫고 답을 찾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옛것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지혜와 지식의 원천이라고 소개할 교사는 없을 것이다. 교사는 뭔가를 전해주는 사람일 뿐이다. 전해주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지만 그 앎은 완벽한 이해와 통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누가 가르치는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교사에게 필요한 제일 조건(어쩌면 유일 조건)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믿고 좋아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쉬운 조건이다. 자기가 믿고 좋아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큼 즐겁고 행복하고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반대로, 가르치는 대로 살아내고 가르치는 대로 믿고 좋아하는지 보여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믿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살고 있는 것을, 그래서 알게 된 것을, 그래서 더욱 믿게 된 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교사다. 그 모든 추구의 대상은 하나다. “옛것”이다. 오래된 것, 역사적인 것, 불변하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옛것이 인생의 중심이고 가르침의 중심이었다. 그렇게 전해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위대한 스승의 비밀이었다.

교육은 지식 주입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교육은 못보는 사람에게 시력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시력 있는 사람이 올바른 방향을 보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은 영혼의 전환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혜의 바다로 가족을 보내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우물을 주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말이다.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자기 수준의 우물에 아이들을 가두려 하는가? 아이들이 우물 밖에 나갈까봐 또 얼마나 노심초사하는가? 보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날개를 가진 새에게 필요한 것은 날개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창공을 보는 것이다.

나는 자유를 맛보았다. 나는 부족하고 미약하다. 혜안(慧眼) 따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꿰뚫지도 못하고 부수지도 못하고 세우지도 못한다. 하지만 옛것을 믿는다. 좋아한다. 그리고 가족을 사랑한다. 공자는 그러면 됐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이 시작이라고, 그것이 끝이라고 말해주었다.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고전을 펼친다는 것은 부모가 (지혜의 원천인 척하는) 교사 흉내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이다. 옛것의 통로가 되고 옛것을 좋아하는 인생 선배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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