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RIZE 우주여행의 시작>
피터는 1983년 6월, 분자생물학 학사로 MIT를 졸업했다. 학부에서는 우주 실험부터 유전공학에 이르기까지 눈부실 정도로 여러 연구에 참여했었다. 지금은 의대로 가는 길이었다. 피터는 스탠퍼드에 조기입학 대상자로 선발되어 날씨 좋은 팔로알토로 이사했다. 그러다 그해 여름 그리스 배낭여행 중에 하버드 의대에도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하버드 의대 HST(Health Science and Technology: 의료 과학 및 기술) 과정의 입학을 허락받았다. 피터가 ‘아주 독특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마음에 둔 분야였다. 사실 피터는 하버드 의대 HST 과정에 최우선으로 지망했었지만, 매년 25명밖에 뽑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성이 너무 낮아 단념하고 있던 차였다.
하버드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피터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하버드 의대에 다닌다고 말하면 마치 ‘수소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잘난 체하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학교 이름을 밝히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긍정적인 면은 여자 친구를 사귀기가 쉽다는 점이었다. 물론 의대에서 데이트 시간을 갖기란 잠잘 시간을 갖기만큼 힘들기는 했다. 의대는 하버드대 캠퍼스에서 찰스강을 건너 약 15분 거리에 있었다. 정면을 대리석으로 치장한 건물 다섯 동이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쿼드(Quad)’라 불리는 잔디밭이 의대의 중심이었다.
피터는 캠퍼스에 있는 ‘밴더빌트 홀(Vanderbilt Hall)’이라는 학생 기숙사에서 첫해를 보냈다. 의대 건물의 바깥쪽은 병원 건물이 둘러싸고 있었다. 피터는 학교 역사를 사랑했고, 길이가 몇 킬로미터나 되는 지하 통로를 좋아했다. 간혹 데이트를 하게 되면, 여자 친구와 함께 의대 행정관 건물 위에 있는 박물관에 가곤 했다. ‘워런 해부학 박물관(Warren Anatomical Museam)’은 의료 역사를 자세히 보여주는 각종 전시물로 가득했다. 19세기에 쓰던 수술 도구, 초기 현미경, 현미경을 통해서 본 물체의 상, 골상학 연구를 위한 여러 얼굴의 석고 모형, 위대한 외과 의사들의 오른손 석고 모형, 초기에 수술할 때 쓰던 소독 용구 등을 비롯해 섬뜩한 것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쇠막대가 두개골을 관통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의 두개골이었다.
피터에게 의대는 열정보다는 의무였고 가족에 대한 책임이었지만, 그래도 의사 자격을 취득하면 우주에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피터가 조사한 바로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지 않을 바에야 의사가 되는 것이 우주비행단(Astronaut Corps)에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최소한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는 연구를 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시간이 지나면 기술이 발달하여 자신이 꿈꾸고 있는, 누구나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니 오래 살수록 우주여행의 가능성이 높을 터였다. 피터는 또 만능인이 되는 상상을 즐겼다. 보이스카우트 단원 시절 연극에서 맡았던, 세 역할을 동시에 하는 소년이 롤모델이었다. 피터가 새로 좋아하게 된 허구의 영웅은 영화 <버카루 반자이의 모험(The Adventures of Buckaroo Banzai Across the 8th Dimension)>에 나오는 주인공 버카루 반자이였다. 버카루는 최고의 신경외과의사이자 입자 물리학자이면서 카 레이서에다 록 가수였다.
영화 <버카루 반자이의 모험(The Adventures of Buckaroo Banzai Across the 8th Dimension)>
버카루는 다방면에 완벽한 기량을 갖추고 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까닭이 없었다.
피터는 하버드 의대 계단식 강의실 A에 앉아, 나누어주는 서류를 받은 뒤 교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4년 수업을 마친 다음 어디서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을 받을지 기재하라는 양식이었다. 피터는 이미 1차 의사자격시험을 통과했고, 4학년을 마치면 2차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2차에 합격하면 인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인턴을 마치면 3차 시험을 치르고 의사 면허를 받게 된다. 그런 다음 선택한 전문 과목에 따라 2~7년에 걸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피터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가고 싶은 병원을 차례대로 쓰라고? 전문 과목을 정해야 한다고? ‘나는 그냥 로켓이나 만들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2학년 때뿐만 아니라 3학년이 되어 임상실습을 하는 지금까지도 시간제로 근무하는 사람처럼 간신히 의대 생활을 꾸려 왔었다. SEDS도 운영해야 했고, MVL 연구도 해야 했고, 전국 규모의 우주 박람회도 개최해야 했다. 우주는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우주왕복선의 발사 빈도가 점점 늘어나 1981년 두 차례 발사되던 것이 1985년에는 아홉 차례나 발사되었다. 피터는 무릎 위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보며 마음속에서 갈등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되면 의료행위와 우주 관련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없을 터였다. 잘못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잘해야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좌절한 의사밖에 더 되겠는가. 이렇게 자기 생각에 빠져 있던 피터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텅 빈 강의실에 자기 혼자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강의실 불을 끄는 중이었다. 피터는 서류를 아무렇게나 백팩에 집어넣은 뒤 걱정과 흥분이 뒤섞인 마음으로 행정실로 갔다. 피터의 머릿속에 양쪽을 다 만족시킬 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피터는 행정실 직원에게 MIT의 ‘인간 운송수단 연구소’로 전화를 좀 걸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자신의 오비완 케노비(Obi-Wan Kenobi)인 연구소장 래리 영 박사와 상의하고 싶었다. 마침 영 박사는 연구소에 있었다. 피터는 침착하게 자기 상황을 설명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MIT로 다시 돌아가 16번 과정(항공우주공학 및 디자인 입문 과정)에서 석사나 박사 코스를 밟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하버드를 휴학하고 항공 및 우주공학 과정에 들어가, 이 중요한 결정을 미루고 싶었던 것이다. 영 박사는 입학 신청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나서서 빠른 길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박사는 그동안 피터가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젊은이가 언제쯤 의학에서 우주과학으로 진로를 바꿀까 하고 궁금해하던 차였다.
우주를 향한 래리 영 박사의 사랑은 비치볼 크기만 한 스푸트니크 위성이 지구 궤도에 오른 1957년 10월 4일 시작되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소르본 대학에서 응용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배편으로 프랑스에 가던 길이었다. 박사가 프랑스에 도착한 첫날 밤, 만나는 사람마다 손에 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박사는 응용수학에서 우주로 진로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왜 우주를 선택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했어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본인은 알잖아요.” 박사의 자동차 번호는 2MARS(‘화성으로’란 뜻)다. 박사의 제자 바이런 리히텐버그는 미국 최초의 탑승 실험 전문가가 되었다. MVL에서 진행된 많은 실험 결과가 우주왕복선 계획에 반영되었다. 박사는 피터가 똑똑하고 열정적이며 아이디어가 넘치는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피터의 눈은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열의에 차 있었다.
하버드도 재미있기는 했지만 MIT로 돌아오니 너무 기뻤다. 이제 피터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항공우주공학을 배우게 되었다. 부모님께는 학위 하나만 더 받고 의대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씀드려 안심시켰다. 이제 연구소나 강의실에서 피터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터빈 실물, 비행 시뮬레이터와 모형, 비행기와 로켓의 사진 등으로 바뀌었다. 2학년 때 수강하는, 과정의 성패가 달린 2학기짜리 통합공학마저도 피터에게는 즐거운 도전이었다. 동급생보다 네 살이나 많은 피터는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고체역학 및 재료공학의 기초가 되는 수학 방정식과 원칙, 유체역학, 열역학, 추진 원리 등을 배웠다. 통합공학은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친 내용을 많이 다루기 때문에 학생들은 서로 힘을 합해 문제를 풀어야 했다. 피터는 옛날 아지트였던 남학생 클럽 ‘세타델타치’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같이 공부할 새 회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007 뷰 투 어 킬(A View to a Kill)> 같은 개봉 영화를 보거나, 고고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새벽까지 파티를 벌이는 광란의 밤도 있었다. 애인이 있었으면 하는 때도 있었지만, 사랑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MIT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터는 영 박사를 만나 석사학위 논문 주제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했다. 피터는 근육의 약화나 뼛속의 칼슘 상실 등 무중량 상태에서 발생하는 여러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인공중력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영 박사에게 우주인이 자는 동안 중력을 받을 수 있도록, 운동 반경이 좁은 회전침대를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했다.
우주에서 오래 머물려면 인공중력을 발생시키거나 운동을 많이 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했다. 1973~79년 사이에 지구궤도를 돌던 나사의 우주 정거장 스카이랩의 우주인들이 귀환했을 때, 그들의 몸 상태는 떠날 때보다 훨씬 나빠져 있었다. 당시 우주에 몇 달을 머물며 우주 체류 기록을 세웠던 오웬 개리엇(Owen Garriott)과 윌리엄 포그(William Pogue)가 지구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을 검사한 항공 의무관의 공식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절한 예방 수단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1년 반에서 3년 정도 장기간 우주에 머물면 근골격계의 기능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우주인들은 근 위축과 골 밀도 감소 외에도 균형 감각 장애를 겪었다. 이 증상은 다른 증세가 다 치유된 뒤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눈으로 봐서 수직과 수평의 구분이 되지 않는 어두운 곳에 가면 비틀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우주 정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자기 옆 공간에 띄우려는 사람도 있었다.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와 베르너 폰 브라운은 인공중력을 만들기 위해, 회전하는 커다란 원형 우주 정거장을 구상했었다. 스카이랩 프로그램이 끝난 다음 해 시작된 나사의 에임스 연구센터(Ames Research Center)프로젝트도 바퀴 모양의 우주 정거장을 구상했다. 이 우주 정거장은 주거시설로 예정된 바퀴의 테두리 부분이 받는 원심력이 지구의 중력과 같아지도록, 1분에 한 바퀴씩 회전할 계획이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도 ‘디스커버리 1호(Discovery One)’ 우주선은 승무원실 안에 회전하는 커다란 원심력 발생기를 갖추고 있다.
피터의 이야기를 듣고 난 영 박사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더 구체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우주인의 속귀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피터에게 해결책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MIT로 자신을 찾아와 함께 산책하던 중 어린이 놀이터에서 그 답을 찾았다. 피터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피터를 볼 때마다 버릇처럼 참한 그리스 아가씨를 만났느냐는 질문부터 하던 어머니는 속으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터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피터가 보고 있는 것은 놀이터에 있는 회전뱅뱅이, 즉 회전목마처럼 빙빙 도는, 손잡이가 달린 둥근 원판이었다. 피터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회전에 의해 생기는 힘, 즉 원심력은 속도의 제곱과 회전체 반지름의 함수다. 회전체 중심에서의 속도는 0일 터였다. 만약 우주인의 머리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주인의 전정기관이 회전체의 중심에 놓인다면, 우주인의 속귀를 손상할 각속도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피터는 동생 손을 잡고 놀이기구로 달려갔다. 회전뱅뱅이 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잠시만 내려 달라고 부탁한 뒤 동생한테 머리를 놀이기구 가운데로 두고 누우라고 했다. 동생이 싫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동생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가끔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엉뚱한 데 정신이 팔린 이 모습이 바로 오빠의 본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눈을 감고 누운 동생을 피터가 돌렸다. 다음은 피터 차례였다. 피터는 아이들 엄마 몇 명이 다가와 자기네가 하는 짓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쏘아볼 때까지 놀이기구에 계속 누워 있었다. 그날 밤늦게 학교로 돌아온 피터는 자기 생각을 그림으로 옮겼다. 우주왕복선 안에 들어갈 만큼 조그만 장치가 필요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레이건 대통령이 구상을 밝힌 국제 우주 정거장에도 들어갈 터였다. 부품을 실은 로켓 발사가 임박했다는 보도가 있을 만큼 국제 우주 정거장 건설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피터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주인이 잠자는 동안 투약하듯 중력 1회분을 넣어 줄 수 있다면 어떨까?’ 그 다음 주 목요일 피터는 MVL에 가 영 박사에게 자기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피터는 자신이 그린 그림 석 장을 보여주었다. 회전하는 널빤지 모양의 침대를 우주선 바닥에 깐 그림과 창고 옆 벽에다 세운 그림, 또 이동할 수 있는 막대 모양의 침대 그림이었다. 피터는 여기에 ‘인공 중력침구(AGS: Artificial Gravity Sleeper)’라는 이름을 붙였다.
“만약 우주인이 원심력 발생기 안에 들어간다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잠자는 중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우주인이 자는 동안 심혈관 계통을 운동시킬 수 있고, 면역체계에 자극도 줄
수 있게 됩니다.” 피터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 박사는 그림을 보더니 “괜찮은 생각 같긴 하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회전하며 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피터는 놀이터에서 직접 실험을 해봤고, 심지어 돌면서 잠깐 졸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력장 안에서 잠을 잔다면, 중력을 약이라 생각하고 네 시간마다, 여섯 시간마다 등으로 투약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우주에서 침대의 원심력은 중력처럼 작용할 것이고, 그러면 우주인의 몸은 무중량 상태에서보다 훨씬 힘들게 운동할 것이라고 했다. 우주인의 머리는 중심에 놓일 것이므로 레코드플레이어의 축처럼 원심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피터는 우주재단(Space Foundation), 나사,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미국심장협회(American Heart Association), MIT 항공우주학과 등으로부터 5만 달러의 연구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동력설비를 갖춘, 회전하는 우주침대 제작에 돌입하였다. 피터는 직접 도면도 그리고 계산도 하며 반경 2미터의 원심력 발생기를 만들었다. 분당 40회까지 돌며 3G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이 침대는 허니콤을 채워 넣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침대에는 평형추가 달려 있었고, 회전하는 사람의 상태를 모니터하기 위해 도금한 슬립링을 통해 원격으로 측정신호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동심원으로 배치한 지름 15센티미터 파이프와 지름 20센티미터 파이프 사이에 밀봉 볼 베어링을 넣고 연결한 뒤, 그 위에 AGS라 불리는 이 침대를 설치했다. 피터는 MIT 학생들에게 회전하는 침대 위에서 잠을 자며 하룻밤을 보내면 30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친구이면서 SEDS의 간부이기도 한 토드 홀리가 맨 처음 자원했다. 토드는 AGS에서 연속으로 9일 밤을 보낼 정도로 최고의 지원자였다. 피터는 관찰 기록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기구가 정말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토드는 이 침대 위에서 잠을 잘 잤다. 토드는 환상적일 정도로 협조를 잘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평 한마디 없었다.’ 피터는 관찰과 데이터 판독을 통해 수면을 평가했다. 어느 날 영 박사가 지나가는 길에 들러 자신이 침대에 한번 올라가 보겠다고 했다. 박사는 몇 분 있다가 내려와 훌륭한 기계라고 칭찬했다. 그다음 번에 피터가 전원을 넣자 파이프의 플랜지가 풀리면서 기계가 폭삭 무너져 버렸다. 피터는 MVL의 오비완 케노비를 죽일 뻔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다. 기계 결함을 수리한 피터는 다시 실험을 시작했다. 피터는 운동 기구 개발에도 착수해 우주인이 등을 대고 누운 자세로 페달을 밟을 수 있는 ‘고정식 자전거’를 만들었다. 피터는 그런 매 순간을 즐겼다. 에스테스 로켓을 만들고 화학실험을 하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우주에서 사람이 사는 데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7년 4월 피터와 토드 홀리, 밥 리처즈는 훨씬 크고 새로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모든 학과가 우주 관련 분야만 가르치는 우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피터밥토드’라 불리는 이 삼총사는 벌써 수년 동안 석・박사 과정만 있는 대학원대학의 설립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세계 최초로 우주 관련 분야만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비영리, 비정부 대학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세 사람은 자기네가 만든 작품(SEDS와 인기 있는 전국 우주 박람회)에 기대어 신뢰성을 확보하면서 외부 기관 및 인사와 접촉했다.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4월 중에 사흘 동안 SEDS가 발족한 MIT의 스트래턴 학생회관에 수백 명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 석사 학위를 받기에는 아직 01개월이 모자라고, 의사가 되기에는 1년이 부족한 피터가 다시 폴 그레이(Paul Gray) MIT총장의 지원을 받아 소련, 캐나다, 일본, 중국, 유럽우주기구(European Space Agency), 나사 등의 우주 관계 대표단과 고위 임원을 콘퍼런스에 끌어들였다. 개막 회의에는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들었다. 피터는 국제우주대학 프로젝트의 창립 콘퍼런스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환영 인사를 한 다음 미국 우주계획의 상황에 관하여 열변을 토했다. 우선, 아폴로11호가 달에 착륙한 뒤 나사는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아폴로 계획의 후속으로 세 가지 안(빠른 속도, 중간 속도, 느린 속도의)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안에서 제시한 일정을 보면 요즈음 SF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세 안 중 가장 느린 속도로 진행하는 안은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피터는 이렇게 말하며 단계별 완료 목표 시점을 보여주었다.
•우주 정거장 및 우주왕복선: 1977
•궤도 간 운송기(우주 정거장과 우주선 사이의 운반용 우주선): 1981
•달 궤도 우주 정거장: 1981
•달 기지: 1983
•50인 거주 우주 기지: 1984
•화성 탐사: 1986
•100인 거주 우주 기지: 1989
“도대체 지난 18년 동안 이루어진 게 뭐가 있습니까? (……) 이제 다시 인류를 우주로 보낼 엔진과 비전을 재정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엔진이 바로 여러분이고, 전 세계에 있는 학생들입니다. 그 일을 해내는 데 국제우주대학(ISU: International Space University)이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막 회의는 바이런 리히텐버그, 존 맥루카스(John McLucas) 전 미국 공군장관, 조 펠튼(Joe Pelton) 인텔샛 국장 등 저명인사들이 진행하였다. 인텔샛(Intelsat: 국제통신위성기구)은 통신위성의 배치를 관리하는 정부 간 컨소시엄이다. 회의에서 논의된 주제는 학교의 강령부터 수업과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맨 처음부터 국제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토드였다.
피터와 토드, 밥은 긴 테이블이 늘어선 회의실 끝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 중에는 고위 임원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교수도 있었고, 토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세 사람의 계획은 다음 해인 1988년 여름에, 8주에 걸친 첫 수업을 시작으로 대학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벽돌과 시멘트, 즉 캠퍼스는 빌려 쓰고, 교수는 세 사람 각자의 대학에서 모시기로 했다. 목표는 세 사람이 운영하는 상설 캠퍼스였고, 꿈은 우주의 캠퍼스였다. 총장으로 모실 저명인사로부터는 이미 승낙을 받아 놓았다. 세 사람이 아서 아저씨라고 부르는 아서 C.클라크였다.
피터는 자신이 무언가 큰일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두 번째로 학생회관을 나왔다. 이런 노력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우주를 꿈꾸는 새로운 세대의 호기심을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우어야 했다. 바로 전해 있었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비극 이후(피터는 인간 운송수단 연구소에서 CCTV를 통해 발사 장면을 보았었다) 위험을 보는 시선이 칭찬받아야 할 행위에서 한탄할 행위로 바뀌는 분위기였다. ‘실패는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다’라는 말이 나사의 주문으로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발사되지 않았다. 우주왕복선 계획은 좌초되었다. 추도사와 손가락질과 논쟁만 난무했다.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보고서가 작성되었으며, 타운홀 미팅이 열렸다. 두려움이 용기를 몰아내 버렸다.
사흘에 걸친 콘퍼런스가 끝나고 밤이 늦은 시각, 피터는 얼마 전에 다 읽은 《아틀라스(Atlas Shrugged)》를 집어 들었다. 토드가 준 두꺼운 책이었는데, 이제 거의 자신의 플레이북(playbook: 미식축구의 공수 작전을 수록한 책)처럼 되어 버렸다. 피터는, 가장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창조의 엔진이 되는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파업하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린 이 이야기를 읽고 감명받았다. 피터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정부가 기대를 저버렸을 때,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소수의 인물이 자기네가 원하는 미래의 비전을 만들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피터는 모서리가 접히고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진 책을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개막연설을 할 때 자신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시 엔진을 재정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 ‘여러분’이 바로 그 엔진입니다.” 피터는 책을 뒤적이다 밑줄 그어 놓은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자신이 가장 동질감을 느끼는 불요불굴의 기업가 행크 리어든(Hank Rearden)이 한 말이었다. 리어든은 10년간 노력해 새로운 금속을 만들어냈으며 그 과정에서 인생의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피터는 리어든이 소설 속에서 한 말을 큰 소리로 읽어 보았다.
“그런 바보짓은 모두 한순간이야. 절대 지속될 수 없어. 그건 미친 짓이기 때문에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어. 당신과 나는 당분간 조금 더 힘들게 일하게 되겠지. 그것뿐이야.”
피터 또한 자기 앞길을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처지였다. 자기 꿈은 언제나 우주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자기에 대해 가진 꿈은 언제나 의사였다. 집안의 전통을 존중하고 싶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충실해지고 싶기도 했다.
미 대륙 반대편에 있는 눈 덮인 산 위에서도 이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벌어지고 있었다. 피터보다 몇 살 어린 이 젊은이 또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고 있었지만, 유명한 성이 주는 부담을 떨치지 못했다.
피터는 아직 이 젊은이와 그가 가진 유산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