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1983년 천경자는 미국의 최남단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다리로 이어진 섬들을 지나 마지막에 있는 섬 키웨스트를 방문했다. 마치 하늘을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해안도로로 유명한 키웨스트는 바다낚시를 좋아했던 헤밍웨이가 무명작가 시절에 살았던 곳이다. 그는 결혼을 네 번이나 하면서 그때마다 거주지를 옮겨 다녔는데, 이곳은 둘째 부인이었던 폴린과 함께 지낸 곳이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 『킬리만자로의 눈』과 같은 주옥같은 걸작들을 썼다.
키웨스트에 도착한 천경자는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이었다는 ‘슬로피 조’를 찾았다. 전자음악이 요란하게 울리는 술집 안에는 헤밍웨이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디스코를 추는 젊은이들과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와글와글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여자 종업원에게 헤밍웨이가 즐겨 마신 술이 뭐냐고 묻자 그때 자기 나이가 두 살이어서 모르겠다고 답해 웃음이 나왔다. 당시 헤밍웨이는 이 술집 주인과 무척 친했다고 한다.
부친이 외국 화장품 점포를 운영하여 부유했던 헤밍웨이의 부인 폴린은 이곳에 다양한 나무를 심고, 2층 서재와 별채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았으며 집 안에 풀장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어느 날 선장으로부터 고양이 한 마리를 선물 받았는데, 이 고양이는 발가락이 6개인 다지증 고양이였다. 헤밍웨이는 이 고양이를 스노우볼이라고 이름 짓고, 집 마당을 개조해서 고양이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게 했다.
스노우볼은 헤밍웨이의 집필을 방해하거나 글을 쓰고 있는 타자기 위에 올라타더라도 혼나지 않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고양이를 너무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집에서 무려 60마리의 고양이를 길렀으며 고양이 전담 고용인과 조수까지 둘 정도였다. 고양이 먹이 값만도 당시 돈으로 매달 6백 달러가 들었고, 헤밍웨이가 낚시해온 생선도 모두 고양이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현재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헤밍웨이의 생가에는 그가 쓰던 가구들과 그가 키우던 고양이의 후손 30여 마리가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일명 헤밍웨이 고양이로 불리는 이들은 일반 관람객이 접근할 수 없는 헤밍웨이의 침대에서 낮잠을 즐기는 특권까지 누리고 있다.
천경자는 키웨스트의 창이 많은 시원한 집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낚시, 저녁에는 바에 나가 주인과 담소를 나눴을 헤밍웨이를 생각하며 그의 집을 그렸다. 헤밍웨이는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고 가혹한 현실에 맞섰다가 패배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했다.
천경자의 작품 <헤밍웨이의 집 2>36에는 루소의 식물들이 연상되는 야자수 밑에서 헤밍웨이의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무리지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치 헤밍웨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그들은 영민한 눈빛으로 영원히 부재할 주인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