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루이지애나, 그리운 그녀

<여행의 이유>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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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멕시코에서 방송 촬영 일정을 마치고 텍사스 댈러스에서 솔트레이크 시티를 거쳐 LA로 가는 델타항공 2121편을 탔다. LA에서 하루를 체류하고 다음 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끝자리에 앉자마자 잠에 빠졌다. 한 시간쯤 뒤 깨어났을 때, 나는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 괜찮아요. 저도 깜빡 잠이 들었어요.”

옆자리의 그녀는 신문을 펴고 십자 단어 풀이를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온 나는 가방에서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 읽었다. 수수한 차림에 파란 눈, 르네 젤위거를 닮은 아담한 그녀가 내게 물었다.

“혹시 《동물 농장》의 작가가 누군지 아세요?”

“조지 오웰 아닐까요?”

“아, 그렇군요. 조지 오웰…… 맞다.”

“어디서 오셨어요?”

“루이지애나요. 샬롯이라고 합니다.”

“로진입니다.”

“무슨 일을 하세요?”

“글을 씁니다.”

“와, 제가 질문을 제대로 했네요.”

서른한 살의 샬롯은 금융 쪽의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가끔 지역 신문에 기고를 하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휴가를 맞아 LA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1.jpg?type=w1200 ⓒ김경우 스위스 뮈렌


“칼럼을 쓴다고요?”

“네. 가끔.”

“주로 어떤 칼럼이죠?”

“IT 산업에 대한 칼럼이에요. 대학 때 대학신문 기자를 했었죠. 저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해요.”

“대단하군요.”

“뭐가요?”

“글을 쓴다는 거요.”

“당신도 글을 쓴다면서요.”

“샬롯은 영어로 쓸 거 아니에요?”

샬롯은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벽 하나가 허물어졌다. 지금 사는 곳은 루이지애나지만 그녀는 원래는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자랐다. 샬롯은 브리검영 대학을 나왔다. 나는 이 대학을 나온 사람 몇 명을 알고 있다. 독실한 몰몬교도인 그들만이 가진 순진무구한 눈매가 있다. 샬롯 역시 그걸 가졌다.

“작가라고 하셨죠? 주로 뭘 쓰세요? 소설?”

“소설은 어려워요. 에세이를 써요. 유머리스트라고 할까?”

“아하. 예를 들면 빌 브라이슨 같은?”

“그런 거죠. 칼럼니스트로 치면 아트 부크월드 부류라 할까요.”

“와, 아트 부크월드를 아세요?”

“팬이에요.”

“이런. 저도요.”

벽 하나가 또 허물어졌다. 샬롯은 자세를 바르게 하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푸르고 깊은 샬롯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부크월드의 부고 기사를 봤어요. ‘안녕하세요. 아트 부크월드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였죠. 정말 대단한 유머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죽음을 앞두고 그런 여유를 갖는다는 건…… 삶에 대해 초월한 사람이나 가능하죠.”

“그게 다 웃음의 힘일 거예요.”

“부크월드를 위해서 잠시 묵념을 할까요?”

샬롯은 다시 깔깔거리며 내 어깨를 세게 쳤다.

“이게 당신 식의 묵념인가요?”

그녀는 더 크게 웃으면서 연달아 세 번 나를 때렸다. 이번엔 좀 아팠다. 물론 고등학교 때 패싸움을 하며 맞았던 것보다는 훨씬 덜 아팠지만. 이제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벽은 없다.

“아, 정말 미안해요. 이게 저의 좋지 않은 버릇이에요.”

샬롯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나는 대답했다.

“견갑골을 부러뜨리려면 좀 더 세게 쳐야 해요.”

그녀는 또 웃었지만 나를 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내 어깨를 쳤을 때, 우리 사이의 성채도 함께 부숴버렸다. 더 이상 깨뜨릴 담이 없으므로 이제 샬롯은 더 이상 나를 해체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행은 이제 겨우 한 시간 남짓 남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는 영어회화 책의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대화를 했다. “가족은 몇 명인가요?” “좋아하는 음식은 뭔가요?” “가장 기억나는 영화는 뭔가요?”…… 샬롯은 언니와 열 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여전히 루이지애나에 산다. 샬롯은 스시와 카레를 좋아하며 <터미네이터>와 밥 말리를 좋아했다. 영화와 음악은 내 취향과 똑같았다. 내가 “터미네이터 중에는 2편이 최고” 라고 했을 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맞장구를 쳤다. 무슨 말만 하면 바로 리액션을 보였다. 애초에 논쟁 따위는 안중에 없었고 무조건 찬성이었다. 대화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소통이라는 듯.

2.jpg?type=w1200 ⓒ김경우 호주 빅토리아주



명로진

인디라이터. 1991년 영국을 필두로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북-중남미 등 세계 6대륙을 여행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칼라하리 사막에서 부시맨과 함께 생활하고 안데스 산맥의 침보라소(6310m) 봉 원정을 다녀왔다. 리비아 사막의 오지 마을, 아마존 상류의 원주민 마을, 북극권 로마니에미의 산타클로스 마을 등에 체류하였으며, 인도의 국가 지정 문화유산인 전수자로부터 카탁 댄스 강좌를 수료하고, 쿠바에서 살사 댄스를 배웠다.

멕시코 마드레 옥시덴탈 산맥의 따라우마라 족과 마라톤을 하고, 핀란드 라흐티에서 40km 크로스컨트리 스키 대회에 참가했으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앞 지중해 바다에 파묻힌 고대 로마 유적을 보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하기도 했다. 혼자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타고난 노마드인 그는 오늘도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다음 여행지를 꿈꾼다.

지은 책으로 《도쿄 미술관 예술기행》 《해피 론리 데이즈》 《펜도롱 씨의 똑똑한 세계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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