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RIZE 우주여행의 시작>
1991년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아침 피터는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그레그 메리니악(Gregg Maryniak)과 로봇을 만들려고 뉴저지 주 호프웰에 갔다. 그레그는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의 이사이자 ISU 교수로, 피터가 ‘형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피터가 그레그를 알게 된 지는 10년 가까이 되었다. 토드 홀리가 1982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열린 SEDS 회의에 그레그를 연사로 초청하면서부터였다. 최근에는 둘이 만나 재미 삼아 이것저것 디자인하고 만들어보는 일이 잦았다. 그레그 집 지하에 있는 작업실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다 보면, 위성발사회사인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를 깨끗이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10월 19일 토요일)은 하늘이 유난히 맑고 계절답지 않게 날씨가 따뜻한 데다 가을빛이 너무나 풍요로워 실내에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15분 거리에 있는 프린스턴 공항으로 가 오래된 세스나(Cessna) 172기를 빌렸다. 4인승 단발 고익기(동체 위에 날개가 배치된 비행기)로 등록번호는 N65827이었다. 피터는 부조종사 자리인 오른쪽에 앉았다. 모든 조종사가 꿈꾸는 날이었다. “완전히 CAVU(Ceiling and Visibility Unlimited)군.” 그레그가 ‘비행하기 최적의 날씨’라는 뜻의 항공용어를 쓰며 말했다.
그레그는 세스나기를 고도 760미터 가까이 띄운 후 프린스턴 공항 북동쪽에 있는 라리탄 만 입구로 날아갔다. 그런 다음 기수를 동쪽으로 돌려 북쪽에 있는 스태튼 섬과 남쪽에 있는 저지 해안 사이로 날아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베라자노내로스 다리 위를 날아 허드슨 강 회랑지대를 거슬러 올라갔다. 오렌지빛, 빨간빛, 포도주빛, 초록빛이 어우러진 나뭇잎을 이불처럼 뒤집어쓴 조그만 마을들이 두 사람 뒤로 지나갔다. 맨해튼의 잿빛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깨를 맞대고 들어선 건물들이 아름다우면서도 거만해 보였다. 초록색 옷을 입은 자유의 여신상이 왼쪽으로 보이더니 오른쪽으로 맨해튼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보다 낮은 높이로 날아갔다.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터가 몇 달 만에 맛보는 즐거움이었다. 회사 부채는 30만 달러나 되는데 당장 현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일부 직원들에게는 다른 자리를 찾아보라고 했다. 이사회는 파산 신청 가능성을 제기했다. 회사가 절망적인 상태라는 판단이 서자 피터는 5~10만 달러 정도 투자할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돈이면 간신히 파산을 면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얼마나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피터는 의대 수업의 부담이 사라지면,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가 SEDS나 ISU처럼 빨리 자리를 잡을 줄 알았다. 피터가 생각하는 이 위성 회사의 목표는 간단했다. 우주로 화물을 운반하는 비용을 줄이고, 정부 독점사업에 대안 역할을 하며, 지구 저궤도 로켓 기술을 발판 삼아 다른 별로 진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회사 업무를 하다 보니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업무가 지루하기도 했고 다툴 일도 많았다. 우선 위성 회사를 만들기 위해 투자를 받는 일이 ISU 발족과 SEDS 발족을 합한 일보다 힘들었다. 게다가 MIT에서 맛보았던 열정적이고 이상적인 우주 논쟁과 대조적으로, 회사에서는 적법성, 계약, 라이선싱 파트너, 전략적 파트너, 판매 회사, 고객, 금융, 정부 규제, 가치 평가 등의 용어에 둘러싸여 지내야 했다.
피터는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자기를 배트맨, 그레그를 로빈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배트맨이 적이 설치해 놓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 버렸어……. 배트맨과 로빈이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이걸로 끝일까?” 피터는 그레그에게 금방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상황이 어려워. 반드시 해내야 해.”
두 사람은 세스나기를 타고 라 과르디아 공항 인근까지 날아갔다가 허드슨 강 회랑지대로 되돌아가기 전에 주위를 잠깐 돌아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그레이트넥에 있는 피터네 집 위로 날아가 보았다. 피터는 넓게 펼쳐진 잔디밭, 긴 진입로, 인근에 테니스 코트가 있는 본가를 가리키며 향수에 젖었다. 어른이 되어서 초등학교에 다시 가 보면 학교가 달라 보이듯 집이 그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피터는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이제 더는 상아탑의 보호를 받는 학생이 아니었다. 학교는 거의 서른이 될 때까지 자신이 머물렀던 고치 같은 존재였다. 피터는 겉으로는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의 장래를 낙관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내 능력을 넘어서는 목표를 설정하게 하는 이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과연 내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부모님의 기대가 여전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전과는 달라졌다. 자신은 하버드 의대를 졸업했으면서도 경제적으로 안정이 보장된 의사의 길을 택하지 않은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우주와 관련된 일로 성공할 때까지는 머릿속에 하버드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을 터였다. 어머니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의사는 안정된 직업이지만 우주는 불확실하잖니?” 거의 두 시간의 비행을 마친 뒤 피터와그레그는 프린스턴 공항으로 되돌아왔다. 비행으로 기분이 고조된 피터는 조종사 면허를 꼭 따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서른일곱인 그레그는 열일곱 살에 조종사 면허를 땄다. 그레그와 함께 비행한 후 조종사 면허를 딴 친구는 열 명이 넘었다. 그레그는 우주를 사랑하는 이 친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도록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 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982년 토드 홀리가 MIT에서 발족한, 학생들이 운영하는 우주 동아리 SEDS에 그레그를 초청하기 위해 전화했을 때 그레그는 ‘우주 정착을 위한 시카고 협회(Chicago Society for Space Settlement)’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그레그가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 있는 자기 집에 들어서서 서류 가방을 바닥에 막 내려놓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열정이 넘치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용이 흥미로운 데다 토드 목소리에서 열의가 느껴져 그레그는 두 시간 가까이 토드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그레그는 법정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열정은 언제나 우주를 향하고 있었다. 그레그는 토드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펜대나 굴리는 일은 집어치우고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자기와 동류의 우주광이었다.
그레그는 SEDS의 선임고문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고 피터, 토드, 밥과 결속을 다졌다. 틈틈이 궤도 역학을 가르치고 우주과학에도 손을 대던 그레그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85년 공식적으로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우주에 뛰어들었다. 그레그는 프린스턴대학에서 우주 연구소를 운영하던 과학자 겸 작가인 게리 오닐과 함께 일했다. 그레그의 아내 모린(Maureen)은 오닐이 이런 말을 하더라며 웃었다. “시인 정도 돈벌이는 될 겁니다!” ISU 설립에도 관여했던 그레그는 피터, 토드, 월트 앤더슨과 함께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의 이사였다.
우주에 대한 그레그의 생각에 영향을 준 것은 세 권의 책이었다. 바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와 《인구 폭탄(The Population Bomb)》, 그리고 오닐의 책 《우주 정착지》였다. 앞의 두 권은 성장이 지속될 수 없다는 암울한 미래를 예측한 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가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다 결국 대량 아사자가 생겨 사회의 격변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오닐도 《우주 정착지》에서 지구의 자원이 유한하고 인구 폭발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는 탈출 전략과 지속 가능한 방법을 제시했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물리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오닐은, 1977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우주에 정착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내용과 유용한 에너지와 물질이 우주에 무한히 널려 있다는 내용을 자세히 다루었다. 오닐은 책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주에 인간을 정착시킨다는 개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계산기를 두드려 보아도 남는 장사이며, 논리적으로 논쟁을 한다 해도 이길 수 있는 내용이다. 그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신념에 입각한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발상을 흔쾌히 공부해보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된다.’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정부의 도움 없이 민간 영역에서 우주에 도전하는 길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책으로 각인되었다. 《우주 정착지》는 그레그에게도 커다란 깨우침을 주었다. 책 내용은 세상이 끝나는 날이 오리라는 시나리오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긍정적이고 실용적이며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책이었다. 법정 변호사의 일은 한정된 파이를 두고 누가 어떤 부분을 차지하느냐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닐은 사고의 폭을 넓혀 자원을 늘리려고 시도하였다. 다시 말해 파이를 키우자는 것이 오닐의 주장이었다.
그레그는 인류가 직면한 도전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프린스턴에 비영리 단체인 우주 연구소를 설립한 목적은 《우주 정착지》에서 제기한 비전과 개념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연구소는 우주제조업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학생들에게 대용량 발사 장치 같은 우주에서 쓸 장비를 만들라고 권장했다. 대용량 발사 장치는 우주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달에 있는 물질을 쏘아 보내는 장비다. 전자기 드라이브 코일을 장착하고 화물을 담는 용기를 갖춘 대용량 발사 장치 시제품은 프린스턴과 MIT에서 만들어졌다.
1년 전이던 1990년 여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여파로 경기침체와 고유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레그와 피터는 거의 매일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의 어려운 재무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회사는 휴스턴에서 워싱턴 DC로 이전했다. 휴스턴은 나사의 유인우주선 기지가 있는 곳이었지만, 워싱턴은 위성 회사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곳이었다.
그레그는 피터가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신의 역할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게 하는 원천으로서의 상수(常數) 같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를 우주선 엔터프라이즈(Enterprise)호라고 한다면 피터는 커크(Kirk) 함장이고 자신은 스팍(Spock) 부함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레그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친구 피터가 걱정되었다. 피터는 심리적 압박을 많이 받는 듯하였고, 조만간 아주 힘든 결정을 내릴 것처럼 보였다.
피터는 메릴랜드 주 록빌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사적으로 누군가를 만날 계획을 세웠다.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회사를 살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 전략 때문에 나중에 두고두고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회사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전 세계에서 투자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만나 보았다. 심지어 자신이 장난삼아 ‘그리스 마피아’라고 부르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친구 12명까지도 접촉했었다. 회사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로켓 발사 실험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지금은 45킬로그램 정도의 화물을 지구 저궤도에 보낼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의 소형 로켓을 만들고 있었다. 실험장비, 통신장비, 촬영장비 등 고객이 원하는 화물이면 무엇이든 운반할 예정이었다.
피터는 회사가 밟아온 과정을 단 분리 로켓에 비유했다. 다단 로켓이 이미 사용한 엔진을 분리해 불필요한 무게를 줄이고 새 엔진을 점화하듯, 회사도 로켓 디자인을 바꾸고 경영진을 바꾸고 이사진도 바꾸었다. 새 이사진에는 마지막으로 달을 밟은 우주인 진 서넌(Gene Cernan)과 나사의 발사체 책임자와 우주 정거장 부책임자를 지냈던 앤디 스토팬(Andy Stofan)이 합류했다. 피터는 1,000만 달러의 자금도 조달했다. 로켓 이름도 골트(Galt)호(《아틀라스》에 나오는 존 골트(John Galt)에서 따온 이름이다)에서 오비털 익스프레스(Orbital Express)호로 바꾸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는 탄력이 붙지 않았고, 직원들 월급 주기에 바빴다. 회사가 제자리걸음하는 원인 중 하나는 투자자 월트 앤더슨이 열렬한 자유주의자인데다가 반정부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앤더슨은 스스로 ‘다소 과격한 평화주의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앤더슨은 ISU에 8만 달러가량 기부하였고,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를 설립할 때는 10만 달러를 투자하였다. 앤더슨의 초기 투자 조건은 정부와 연계된 사람하고는 거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조건은 나중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소형 발사체를 쏘아 본 몇 안 되는 민간 기업은 모두 정부 기관에 소속되거나 정부 계약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었다.
민간 로켓 발사 기업 중 가장 성공한 회사는 MIT와 하버드 경영대학원 졸업생이 설립한 ‘오비털 사이언스(Orbital Sciences)’였다. 이 회사의 로켓인 페가수스(Pegasus)를 설계한 사람은 MIT 교수였던 안토니오 엘리아스(Antonio Elias)였다. 스페인에서 자란 안토니오는 어렸을 때 하늘을 쳐다보고 비행기를 찾는 일을 가장 좋아했었다고 한다. 지구 저궤도에 450킬로그램까지 화물을 운반할 목적으로 제작된 페가수스는 X시리즈 항공기 일부와 맥도넬 더글러스의 F-15 이글(Eagle) 전투기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페가수스는 1990년 4월 5일 나사의 B-52 항공기에 실려 12,000미터 상공으로 올라가, 공중에서 수평으로 발사된 뒤 엔진이 점화되어 우주로 쏘아 올려졌다. 페가수스는 최초로 민간이 개발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우주 발사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첫 고객은 미국방 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이었다. 로켓의 델타 윙(삼각형 모양의 날개), 꼬리날개, 날개와 동체의 접합부위 페어링은 보이저호로 명성을 떨쳤던 모하비 사막의 마술사 버트 루탄이 설계했다. 몇십 년 전 F-15 이글 제작 작업에 수개월간 참여했던 버트는 공중발사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비교적 저렴하고 융통성 있게 화물을 우주의 시작점까지 보낼 수 있는 방식을 발견한 것이었다.
1991년 이날 피터는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가, 정부가 확보한 상당한 규모의 예산을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날 피터가 사적으로 만나기로 한 사람은, 월트 앤더슨이 악마라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피트워든(Pete Worden)이라는 전략방위구상(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 프로그램에 새로 임명된 기술 책임자였다. ‘스타워즈’로도 알려진 SDI는 새로운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 주도하에 1983년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워든은 천체 물리학자이자 입바른 말을 잘하는 공군 대령이었다. 워든은 나사가 ‘절대 솔직히 대답하지 않는다(Never A Straight Answer)’의 약자라고 하며, 나사를 ‘저절로 녹는 아이스크림콘’이라고 비판하였는데도 나사가 기용할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1980년대 후반에 처음 만났다. 당시 피터는 ISU를 운영하고 있었고, 워든은 백악관 국가우주위원회(National Space Council)에서 새로운 계획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워든은 쓸 수 있는 예산이 없을 때라 두 사람은 그냥 연락이나 하고 지내는 정도의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워든은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워든은 저비용 소형 위성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워든이 피터 집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인류의 우주 진출을 주제로 오랫동안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든은 우주왕복선을 더는 믿지 않았다. 우주왕복선은 ‘흥미로운 실험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인간을 다시 달에 보내거나 화성으로 보내는 일도 아니었고, 적절한 비용으로 손쉽게 우주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공하겠다는 기본 임무 달성에도 실패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조만간 다시 만나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 만남은 워싱턴에 있는 워든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우주왕복선부터 당시 구상 중이던 브릴리언트 페블스(Brilliant Pebbles)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논의되었다. 브릴리언트 페블스는 지능화된 소형 위성을 무더기로 궤도에 쏘아 올려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민간부문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단, 정부 개입은 불가피했다. 워든은 피터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장비를 만들고 바깥일을 맡으시오. 내부 작업은 내가 하겠소.” 회의가 끝날 때쯤 워든은,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가 페가수스보다 조금 싸면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발사체를 확보한다면, 정부는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를 두 번째 공급자로 지정해 지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피터는 워든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며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회사를 구할 수 있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일 것인가?
예상했던 대로 당시 회장이었던 월트는 피터가 워든과 협상한 이야기를 듣더니 화를 벌컥 내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터를 포함한 이사진에게 자기 주식을 액면가의 반값에 팔겠다고 했다. 10만 달러를 투자하였으니 5만 달러를 회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회사와 관련되어 자기 이름이 거론되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피터 디아만디스와도 절대 얽히지 않겠다고 했다. 피터에게서 자기가 예전에 알던, 눈이 초롱초롱 빛나던 모습을 더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월트는 피터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그보다 더 심한 말까지 했다. 또 다른 이상주의자 토드 홀리도 월트처럼 강하게 반발했지만 공개적인 표현은 자제했다.
토드는 피터에게 여섯 장에 이르는 편지를 보냈다. 손으로 직접 쓴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나는, 무슨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성공하겠다고 밀어붙이는 자네 모습을 보는 것만큼이나 내가 회사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롭네. 자네가, 결국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도 못할 또 다른 점진적 방식을 쓰려고 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네. 현재의 회사 비전과 접근방법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수구세력처럼 본질적으로 넘기 힘든 또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로 보이네. 혁신적인 새로운 접근방법은 아무 데서도 눈에 띄지 않네.’ 토드는 피터가 이익을 내는 방향으로 회사를 끌고 가려고 한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아무리 잘해도 최종 결과는 훼손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투지가 넘치고 비전과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쏟아부은 수많은 시간은 최종 결과에 결코 드러나지 않을 것이네. 내가 보기에 자네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우리의 목표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포기해 버렸네.’ 편지 끝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진심을 담아, 토드가’.
편지 내용과 맺는말이 피터를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친구는 자기에게 영혼을 팔아먹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커피 잔을 앞에 놓고 며칠 밤을 새워 가며 격렬한 토론 끝에 탄생한 처음의 비전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말은 피터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친구와 피터의 꿈은 민간이 만든 스푸트니크호 수백 대를 쏘아 올려 우주에서 급격한 실험을 촉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주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 워든과의 약속을 빼고 나면(그 약속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회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현실주의가 열정을 이긴 것이었다. 하버드 의대가 MIT를 이긴 것이나 현실 세계가 상아탑을 이긴 것과 같았다.
피터는 토드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 달 이상 생각을 정리해 가며 몇 번이나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편지를 완성했다. ‘1982년 1월 6일 우리가 처음 만나 9년 2개월(3,344일)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감정, 성공, 경험, 모험, 도전을 많이 공유했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함께 나란히 서서 지내 왔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걸세. 나는 자네를 형제로서 사랑하고 동료로서 존경하네. 우리는 함께 참으로 많은 일을 이루었네. 우리가 처음 만날 때부터 나는 우리 에너지와 비전이면 우주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최근에 우리 우정이 금이 간 것 같아 몹시 슬펐네. 사업이나 다른 업무를 떠나서 우정을 말하는 것이네. 토드, 뜻이 다르거나 의견에 차이가 있거나 서로에게서 배우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네. 나는 내 시간과 정력을 내게 아주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고 싶네. 바로 우리 우정일세.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자네 친구, 피터.’
그레그는 양쪽 입장을 다 알고 있었지만 결국 피터 편을 들었다. 회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은 피터였다. 피터는 가족, 친구, 예전 학교 교수, 동료, 남학생 클럽 회원, 우주인 등을 가리지 않고 투자를 권유했다. 자기 말에 귀 기울여 주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전 세계를 다니며 투자자를 설득했다. 알래스카 주지사의 요청을 받고 페어뱅크스 북쪽에 있는 포커플랫으로 회사를 이전할 뻔하기도 했다. 그레그는 우정을 주제로 한 그리스 이야기에 빗대 두 사람을 ‘우주의 다몬(Damon)과 피디아스(Pythias)’라고 불렀다. 이야기 속에서 다몬과 피디아스는 서로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가끔 피터와 토드가 다투거나 서로 말을 하지 않으려 할 때면 그레그는 이렇게 말했다. “웃기는 짓 그만두게. 자네 두 사람 우정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최고일세.”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심지어 피터가 편지까지 보냈는데도, 토드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었다.
드디어 다행스럽게도 토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MIT 근처에 있는 델리 하우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한 날 오후 두 사람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피터는 친구를 보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토드의 표정이 어두웠다. 토드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피터는 회사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다 보니 뭔가 다른 일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토드는 다른쪽을 바라보며 피터의 눈을 피했다. 토드가 식판을 끌어당겨 포크와 나이프를 집더니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피터를 쳐다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 에이즈 진단을 받았어.”
피터는 충격을 받고 의자 뒤로 쓰러졌다. 토드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토드가 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물론 몇 년 동안 ‘여자 친구’ 메리앤과 함께 행사장에 나타나거나 여행을 다니며 감추기는 했었다. 처음 토드가 게이라는 사실을 말했을 때 피터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은 항상 서로의 집에서 함께 자는 사이였지만, 피터는 동성애를 혐오했기에 토드를 만나지 않았다. 몇 달 후 피터는 자기가 바보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토드에게 전화를 걸어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델리 하우스 안에서 피터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자기도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에이즈 환자를 치료해 본 적이 있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해 10만 명가량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스물다섯에서 마흔다섯 사이의 젊은 나이였다. 얼마 전 매직 존슨(Magic Johnson)도 에이즈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었다. 미국 내에서만 에이즈로 확진된 사람이 100만 명에 이르렀다. 에이즈 환자들은 몸이 여위어 가고 얼굴에 곰보 자국 같은 것이 생겼으며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따돌림당했다. 하지만 토드는 똑똑했고 잘생겼으며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피터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토드에게 최고의 치료방법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어릴 때 로켓을 함께 만들던 빌리 그린버그라는 친구가 의사가 되어 에이즈를 실험적으로 치료하고 있다.’ ‘그 친구하고 연락해 보겠다.’ ‘항에이즈 바이러스 약 AZT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토드는 피터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며 두 사람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회의를 주재하면서 침착하고 자신감 있게 대처했던 때를 떠올리며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뛰어난 교수들을 끌어들여 함께 일할 수 있었는지, 또 개인용 컴퓨터나 이메일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전 세계에서 뜻이 비슷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토드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냉전이 끝나기 전인데도 미국의 적 소련을 대학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토드는 이런 말을 했었다. “미국인이 러시아인에 공포증이 있다고 해서 지구상에서 우주여행의 50퍼센트를 차지하는 국가를 배제하면 안 돼.” 토드는 피터에게 은행에서 전화를 받은 날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당시 두 사람은 은행 잔고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전화라고 생각했었다. 토드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더니 은행원이 이렇게 말했다. “토드 씨, 기다리시던 국제 전신환이 도착했습니다.” 으쓱해진 토드가 스페인에서 송금했는지 스웨덴에서 송금했는지 물었다. 은행원이 대답했다. “소비에트연방 교육부에서 보냈습니다. 금액은 12만 달러입니다.” 토드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었다. 소련이 ISU 첫여름학기에 학생 12명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냉전시대의 적이 보내온 돈이 ISU를 살렸다!
델리 하우스에서 몇 시간을 보낸 뒤 두 사람은 서로 포옹하고 헤어졌다. 피터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토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자네는 강한 친구야. 잘 견뎌낼 거야.”
그날 밤 피터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초전도 자석처럼 이 일로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1993년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그레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뉴호프에 있었다. 뉴호프는 프린스턴대학 서쪽 델라웨어 강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볕도 강하지 않고 주위가 한적해 평일 오후에 예배당 의자에 앉아있는 것처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날이었다. 그레그는 가족과 함께 여기저기 거닐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다가 서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점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레그는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책에 발이 걸려 걸음을 멈추었다. 책을 주워 먼지를 털다 제목을 보니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찰스 린드버그가 쓴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였다. 뉴욕에서 파리까지 역사를 새로 쓰는 위험한 비행을 한 린드버그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자신은 열네 살이었다.
그레그는 귀가 접힌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내용을 읽다 보니 슬며시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잠도 안 자고 여기서 계속 조종을 할 수 있다면, 연료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며칠을 날아도 될 만큼 충분히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법의 양탄자를 탄 사람처럼 내가 가고 싶은 곳이면 전 세계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쪽 뒤에는 그때까지 아무도 해보지 못한 대서양 횡단이라는 위업을 달성해야겠다는 린드버그의 생각이 적혀 있었다. ‘뉴욕에서 파리까지 날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벌써 스물다섯이 다 되어 가는 남자다. 게다가 이미 4년 이상 비행한 경험이 있고, 공중에서 보낸 시간만 2,000시간 가까이 되었다.’ 몇 문단 건너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이 아무리 커 보이거나 사소해 보일지라도 하나하나 따라가면 된다.’
린드버그는 대서양 횡단을 하기에 알맞은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모금하기로 했다. 린드버그는 이 위험한 비행을 최초로 성공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한, 탐나는 현상금에 대한 이야기도 썼다. ‘그리고 뉴욕에서 파리까지 최초로 무착륙 비행을 한 사람에게 준다는 25,000달러의 오티그 상(Orteig Prize)도 있다. 비행기 값뿐만 아니라 비행에 소요되는 경비 일체를 지불하고도 남는 돈이다. 뉴욕에서 파리까지 무착륙 비행! 만약 비행기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면, 항공의 미래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린드버그의 생각이 맞았다. 린드버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미래를 봄으로써 비행기 여행에 대한 세계인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하기 전까지 미국 사람들은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린드버그가 파리에 도착한 후 세계인들은 비행기를 타고 싶어 했다. 1929년 미국 여객기에 탑승한 유료 승객은 거의 17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그 전해의 6만 명에 비해 세 배 가까이 늘어난 숫자였다.
서점 계산대에서 딸이 이미 집에 있는 책을 왜 또 사냐고 물었다. “피터 아저씨 줄 책이란다.” 피터가 이 책을 읽고 자극을 받아 조종사 면허를 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터에게 불가능한 꿈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