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by 더굿북

때로는 좋은 영화 한 편이 삶에 지쳤을 때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천경자는 인생의 모진 바람과 폭풍우가 몰아닥친 20대 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다. 애틀랜타의 농장에서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한 뿌리 남아 있는 당근을 뽑아 먹으면서 외치는 장면이라든가, 벨벳 커튼을 찢어 드레스를 만들어 입는 장면은 당시 실의에 빠져 있던 천경자에게 삶의 용기와 의욕을 불어넣어 주었다.


1.jpg?type=w1200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안 리



인생의 근원적인 향수에 젖게 해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장소를 보고 싶은 마음에 천경자는 미국 중부에 있는 애틀랜타로 날아갔다. 미국 남북전쟁의 격전지이자 흑인 노예해방과 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애틀랜타는 미국 문학사상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꼽히는 마가렛 미첼이 태어난 곳이다. 그녀는 법률가이자 역사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들은 남북전쟁 이야기와 방대한 독서를 토대로 역사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했다.

당초의 우려와 달리 이 책은 6개월 만에 백만 부가 넘게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고 그해에만 30여 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이 인기에 힘입어 1939년에 영화화되었고,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안 리는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미첼은 1949년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이 작품 하나로 영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원작의 배경이 된 미국 동남부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는 신사도와 목화밭으로 상징되는 지역이다. 용감한 기사도와 우아한 숙녀, 귀족과 노예의 전통이 잘 보전되던 이곳에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남부의 전통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과거적 가치에 집착하는 남자들과 달리, 진취적인 성격을 가진 농장주의 딸 스칼렛은 강한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해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칼렛은 고향 타라의 고목 옆에서 진홍빛 노을을 바라보며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어제는 바람처럼 사라진 히스토리이고 내일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지만, 우리들은 항상 과거의 실패와 고답적인 전통에 갇혀 괴로워한다. 스칼렛이 남긴 명언은 과거적 가치에 집착하는 우리들의 견고한 편견에 균열을 만들어놓았다.

2.jpg?type=w1200 마가렛 미첼 생가


천경자는 미첼의 유물이 전시된 도서관을 둘러보고, 다음 날 시가에서 멀지 않은 미첼의 생가를 찾았다. 그곳은 누구의 집이라는 표시도 없이 출입금지 표지판만 붙어 있는 3층 건물의 폐가였다.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워하던 천경자는 할 수 없이 건너편 잔디밭에 주저앉아 물끄러미 그 집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이윽고 목화밭을 바라보며 생에 대한 무한한 슬픔을 느끼고, 대작을 쓰고 난 뒤의 허탈감에 젖었을 미첼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폐가나 다름없던 <애틀랜타 마가렛 미첼 생가>39는 천경자의 손을 거치면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초록 지붕의 하얀 집으로 변했다. 지울 수 없는 한과 고통을 남겼던 인생의 역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고요한 대기는 늦가을의 힘없는 낙엽마저 떨어뜨릴 수 없을 것 같다. 하늘의 흰 구름은 보랏빛 환상이 되어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3.jpg?type=w1200 <애틀랜타 마가렛 미첼 생가> , 1987, 종이에 채색, 32x40cm



이처럼 천경자의 풍경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깃든 비극적인 주제나 인간적 슬픔을 정감 있는 색채를 통해 환상의 세계로 승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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