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삶과 죽음의 경계선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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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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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태조 5) 만들어진 한양의 4대문 4소문 중 남쪽의 관문인 소문이다. 광희문과 목멱산 사이에 남소문이 있었으나 연이은 궁궐 내 불행으로 폐문이 되었다. 이후 광희문이 남소문의 역할을 하였다.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옆에 있어 물줄기가 도성 밖으로 나가는 수구문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도성 안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시구문(屍軀門) 역할도 수행하였다. 생로병사 속에 상여가 나가는 문은 대문이 아닌 소문으로 향해야만 했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 높고 험한 산세여서 출입이 어려웠다. 혜화문은 닫혀 있는 숙정문을 대신하여 북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동쪽으로 광희문, 서쪽으로 소의문이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성문이 되었다. 신분의 높고 낮은 구분 없이 누구나 생을 마감하면 상여와 상여 소리가 도성 밖으로 나가는 시구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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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밖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또한 죽음을 달래주는 신당이 많았다. 인조는 창의문을 통해 반정군으로 들어와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행궁 하였다. 광희문은 소문이었지만 왕이었던 인조가 지나갔으니 대문의 역할도 한 것이다.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의 물길, 수구문(水口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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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을 잇는 백악산, 낙타산, 목멱산과 인왕산의 물줄기가 청계천에 모인다. 청계천의 물은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통해 중랑천으로 향한 뒤 한강을 지나 강화도까지 흘러간다. 성벽 아래 물길을 낼 때 수문이 5칸, 2개의 수문으로 이루어졌다. 물줄기가 도성 밖으로 빠져나갈 때 설치한 것으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자 수문이다. 오간수문은 오간수다리, 오간수교, 오간수문교라고도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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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성곽길 18.627km를 걸어보자.
도성 안,
내4산인 백악산, 낙타산, 목멱산, 인왕산을 사이로
4대문인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보이고
4소문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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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흥인문과 목멱산을 잇는 도성 길에 세운 4소문 중 하나이다.
남소문, 수구문, 시구문까지 이름이 많다.
누가 이곳을 지나갔을까?
산 자가, 죽은 자가..
왕이, 백성이, 군사가 그리고 상인이...
도성길의 돌 하나하나에도 역사가 있다.

작은 돌, 직육면체, 정육면체, 화강암...
1396년(태조 5)에 창건되어 역사를 함께한 문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시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
이 광희문을 통하게 가게 된다.
행궁, 이궁하여 광주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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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날 땅속에서 산보 나온 지렁이,
꿈틀거리다 길을 잃었다.
용을 쓰고 아스팔트를 거닐다 탈진할 찰나,
물을 뿌려주고, 잠시 자리를 옮겨준다.

흙의 창자라 불리는 암수 한 몸인 지렁이,
옛날엔 디룡이, 지룡이, 지릉이라 불리었다.
구인, 근인, 지룡, 토룡, 토단 한자어이다.
Earth worm = night crawler
'큰 구렁이가 마루 밑 큰 지렁이가
내보낸 활기찬 기운에 죽었다.'
라는 전설도 있다.
예사로운 놈은 아닌 듯 보인다.


최초의 국립현충원 장충단에서 걸음을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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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 기슭을 걷다 보면 슬프지만 가슴 벅찬 역사의 현장이 보인다. 1900년(광무 4) 고종황제는 목숨을 바친 충신과 열사들에게 봄과 가을에 제향을 하는 터를 만든다. 이곳이 바로 장충단이다.

광희문에서 성곽을 따라 남소문터가 있는 목멱산 끝자락까지 국립현충원의 시초가 되는 단을 만든다. 그 규모가 꽤 크다. 성 밖 공동묘지가 있듯이.. 지금의 신라호텔에서 자유센터를 지나 반얀트리, 국립극장, 동국대학교 정문을 지나는 장충동 일대가 모두 장충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장충단은 폐사되는데, 일본이 벚꽃나무를 심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를 지어 장충공원으로 격하하였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사직단을 사직공원으로 만든다. 우리의 519년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일제는 너무나도 쉽게 바꿔버린 것이다.

목멱산 끝자락,
성곽 아래.
1900년 고종황제는 국립현충원 자리를 찾는다.
남소문터 장충동과 한남동 고갯길의
도성 안에 장충단비와 제각을 짓는다.

봄 가을 제향을 지내며, 밤과 낮에 이곳을 다녀간다.
수표교를 지나면 경희궁의 옛 건물이 보인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이 이곳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희궁 해체 때 이곳으로 이전된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내에 정각원이란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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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 기슭을 걷다 보면 슬프지만
가슴 벅찬 역사의 현장을 만난다.
장충단, 국립현충원의 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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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광무 4) 고종황제는
목숨을 바친 충신과 열사들에게
봄, 가을 제사를 지내는 단의 설치를 명한다.
장충단비는 황태자 순종이 직접 친필로 쓰고
뒷면은 민영환이 143자 찬문을 바친다.
명성황후 민씨와 을미사변의 항일, 배일운동의 열사를 배향하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희생자를 기린다.
장충동 2가 196. 유형문화재 1호.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강점기에 장충단은 폐사되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행사와 제사를 지내는 박문사를 건립한다.
1920년 벚꽃나무를 심어 창경궁과 사직단,
그리고 장충단을 각각 공원화한다.

이곳은 국립 현충원이었던 장충단이다.

청계천 물의 높이를 측정하던 수표교도
1965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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