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중국과 독일 사이에서, 허젠핑

<중국 디자인이 온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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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비엔날레》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포스터 공모전이다. 세계 각지의 실력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포스터로 경합을 이루는 곳으로, 여기에서 수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보통 서양이나 일본 디자이너들이 상을 휩쓰는데 2012년, 드디어 중국 본토 출신의 수상자가 나왔다.

디자이너의 이름은 허젠핑. 중국 저장성 푸양 출신으로 중국미술학원 평면 디자인과를 졸업했다. 그런데 허젠핑의 이력은 다소 독특하다. 분명 중국 출신이지만 베를린으로 유학을 가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역사학과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생의 절반을 베를린에서 보냈기 때문에 중국 디자이너라고 불리기에는 다소 애매하다.

그가 수상한 작품을 살펴봐도 그렇다. 다음은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런던 출신 디자이너, 키스 고다드(Keith Godard)의 전시 홍보 포스터다. 주인공은 물론 포스터를 채운 글자 역시 영문으로 적혀 있다. 언뜻 보면 사람의 얼굴이 절단나서 괴이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종이를 접어 3차원 그래픽 디자인을 실현했던 키스 고다드의 작품 세계를 생각해본다면 흑백 사진을 잘라 재구성한 것이 납득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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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Unfolding Keith Godard》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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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허젠핑은 이 작품을 구성할 때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사물들을 뒤섞어 재배치하고 콜라주한 막스 에른스트의 회화 기법은 허젠핑의 포스터 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전시 장소만 중국일 뿐, 표현 기법이나 주제는 모두 서구적인 느낌이다. 그렇다면 왜 이 포스터가 세계적인 포스터 공모전인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비엔날레》에서 금상을 받은 걸까? 분명 유럽인들이 봤을 때는 이 포스터에 그들의 감수성과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엇을 살펴보기에 앞서 다음 포스터를 먼저 살펴보자.


<In Between He Jianping>


슬로베니아의 NLB 갤러리에서 열린 허젠핑 개인전 포스터인데 모든 글자들의 중간을 마치 먹으로 휘갈긴 것처럼 뭉개놓았다. 내용이나 글씨체 모두 서양의 폰트인데 먹의 느낌 때문에 어딘가 서예 작품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영어 활자와 먹의 경계는 In Between(사이에서)이라는 문구와도 일치한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중국과 독일 ‘사이에’ 있는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2017년 작품에서도 서양과 동양 사이의 관계를 절묘하게 합성해놓은 포스터를 만날 수 있다.


<West-East>


서양의 W와 동양의 E를 수묵기법을 사용하여 섞어놓은 이 작품은 동양과 서양의 긴밀한 사이에 있는 그의 위치를 대변하는 산물이다.


그의 이런 ‘사이에’ 있는 디자인 작업은 계속된다. 산수화에 알파벳을 절묘하게 집어넣는가 하면 올림픽의 오륜기를 만리장성 속에 집어넣기도 한다. 기하학적이고 단단한 영문 폰트가 산수화의 부드러운 수묵과 대비를 이루면서도 뒤섞여 어우러지는 모습은 중국 태생의 독일 디자이너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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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젠핑은 본래 산수화를 좋아하여 서예가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서예과의 입시 경쟁률이 매우 치열하여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장 쉽게 입학할 수 있는 디자인과에 들어간 것이었다. 디자인과는 꽤 적성에 맞았지만 당시 중국의 디자인 교육 상황은 열악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독일 유학을 감행했다. 그동안 배웠던 디자인 교육과 독일의 교육은 완전히 달랐고 현대 서양의 디자인과 회화들은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중국에서 배운 것을 완전히 잊고 서양 디자이너처럼 작업하려 했지만 그들과 뿌리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남들과 다르다면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소재로 작업을 하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나로서도 더 자연스러운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후로 그의 작업은 독일 디자인에 기반하지만 어딘가 동양미가 흐르는 작업으로 변모한다. 블랙 앤 화이트를 쓰더라도 수묵화처럼 흑백의 톤을 구성했고, 영문 폰트와 함께 붓글씨를 첨가했다.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비엔날레》의 포스터 역시 형식이나 폰트는 서양의 것이지만 화면의 구도나 색감은 지극히 동양적이다. 완벽하게 흑백으로 나뉘지 않고 동양화처럼 회색의 중간톤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과 선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다른 중국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처럼 용이나 빨간색 같은 직접적인 중국의 요소를 집어넣지는 않았지만 뉘앙스만으로 중국적 느낌을 전달한다.

이 미학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다음 작품이다. 모교인 항저우 미술학원의 전시 포스터 작업을 맡은 그는 다른 표현을 모두 생략하고 오로지 예술(藝術)을 한자로만 써서 내보냈다. 그것도 제대로 똑 떨어진 형태가 아니라 경계가 불분명하고 희끄무레하다. 겉보기에는 무성의해보이는 포스터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포스터는 동양 미학의 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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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학원 75주년 포스터 <75th Anniversary of China Academy of Art>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
“유,무는 같은 데서 나와 이름만 달리할 뿐이어서 이 같음을 일컬어 현이라 한다.”

한마디로 있음과 없음은 결국 하나이며 이 둘을 구분 짓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가 이야기하는 ‘현(玄)’이란 검을 현, 그리고 가물가물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구분과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한 희끄무레한 상태다. 노자는 세상이 정확히 흑백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며 흑백 사이의 무한한 회색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얘기한다. 그렇기에 수묵화에서 먹과 여백을 경계 짓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먹빛과 번짐 효과를 통해 세계의 오묘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했다.

예술이라는 한자를 정확히 흑백으로 구분 짓지 않고 경계를 뭉개어놓은 이 작품은 현의 세계를 표현한 디자인이다. 허젠핑은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이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흑백의 원리가 아니라 경계 없이 모든 변화와 다양성을 포용하는 작업임을 얘기하고 있다. 그가 작업한 다른 포스터들에서도 이렇게 경계 없음의 미학을 추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image_3797388211517301645687.jpg?type=w1200 <Spirited>
10.jpg?type=w1200 <Peace>


11.jpg?type=w1200 <Leisure>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포스터 비엔날레》의 포스터 역시 확대를 해보면 정확히 경계 지은 선이 아닌 무수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무수한 점들은 멀리서 보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유와 무는 다르지 않고 같은 데서 이름만 달리하는 것이다.

서양에 살고 있는 디자이너가 가장 동양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쩌면 그는 일찍이 서양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서양의 차이를 묻고 자신의 작업에 그 차이를 녹여냈던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 허젠핑에게 어떻게 독일에 머물면서 중국적 디자인을 할 수 있냐고 묻자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가장 일본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의 모든 소설을 유럽 각국을 돌며 집필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가 일본의 사정을 더 리얼하게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독일에 있기 때문에 나의 땅, 나의 모국을 더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항저우와 독일을 오가며 디자이너, 기획자, 교수, 칼럼니스트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 <Design Summer>은 2008년부터 그가 기획하고 있는 워크숍으로 브랜딩, 북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타이포그래피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세계의 그래픽 디자이너를 초빙하여 중국학생들에게 국제적 디자인 감각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부터에는 허젠핑의 주도 아래 항저우와 베를린에 동시에 개최되며 양국의 활발한 문화, 디자인 교류를 이끌고 있다.

동양과 서양, 중국과 독일, 항저우와 베를린, 두 세계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넘나드며 융합을 꾀하는 허젠핑은 너무나 세계적인, 그러면서도 지극히 중국적인 디자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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