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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23. 2018

05. 불행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계단을 닦는 CEO>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기를 데리고 남편의 면회를 갔다. 남편은 여전히 우리 모녀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우리가 면회를 갔을 때 다른 사람과 외박을 나갔다고 해서 쓸쓸히 돌아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기 아빠가 아닌가. 나는 그가 제대하고 나온 후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통 소식이 없던 시댁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군대에서 시댁에 전화를 하고, 시댁이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셋방의 주인집으로 전화를 한 것이다.
  
“아기 엄마, 부대로 가봐야겠어, 얼른. 아기 아빠가…… 자살을 했대.”
“예? 뭐라고요?”
 


부대까지 무슨 차를 타고 어떤 걸음으로 달려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이 죽었다는 말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고 내 몸에 와 닿지 않았다. 부대에 도착한 후 남편의 죽음에 대한 군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남편을 묻으며 시댁 식구들은 “너 때문에 ○○이가 죽었다!”며 울분을 토했다. 나도 나 때문이라고, 내가 재수 없는 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도 나는 곧장 옷가게로 출근했다. 딸과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는 데 시간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일터를 오가다가 군복 입은 사람을 따라서 버스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그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한동안 묘지를 자주 찾아갔다. 일상생활 속에서는 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가 떠나지 않았다. 가서 풀도 뽑아 주고 소주잔에 술을 따르고 담배에 불을 붙여 놔주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질문을 퍼붓다 보면 해가 기울어지면서 묘지 주변이 어두워졌다.
  
“죽을 만큼 내가 싫었어요?”
  
이 자책은 계속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그의 무덤 앞에서나 겨우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묘비를 어루만지고 거기에 새겨진 내 이름을 더듬었다.
  
‘미망인 임희성’
  
한 번도 면사포를 쓰지 못했는데 미망인이라니.
  
“아이 얼굴 기억나요?”
“당신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우리가 학부형이 되었어요.”
“나는 돈 열심히 벌고 있어요. 제가 당신 몫까지 열심히 살게요.”
  
해가 지고 난 후의 묘지가 무섭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도 군복을 입은 남자를 보면 정신없이 따라갔다. 그런 일이 몇 년간 반복되었다.
  
먹먹한 가슴과 달리 현실은 바쁘게 나를 떠밀었다. 제비가 새끼들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처럼 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억눌렀다. 나는 더욱더 미친 듯이 일했고,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어느 누구와도 남편의 소식을 나누지 못했다.
  
불행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다가온다. 불행은 여러 종류가 있고 그 크기도 다르지만, 어떤 불행은 순식간에 나의 모든 의식을 날려 버릴 만큼 강력하다. 그때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슨 목표를 갖고 있는지, 그 모든 것들을 휘발시켜 버린다. 나는 지금도 남편이 죽었단 사실을 안 직후에 있었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필름이 끊어진 듯 토막토막 기억이 떠오를 뿐이다. 이토록 거대하고 아픈 불행이 느닷없이 닥쳐올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야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람들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달았다. 의무나 책임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나의 감정을 보살피지 않으면 마음속의 나는 메말라 간다. 그때의 나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죽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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