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닦는 CEO>
뒤늦게 깨달은 것은 그 누구보다 돈에 연연했던 건 나라는 사실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가족들이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장녀로서 한평생 희생하며 집안을 일으켰으니 가족들이 전부 나를 인정해 주고 우러러봐 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나를 우러러보지도 않고 내가 준 것만큼 돌려주지도 않으니 서운했던 것이다.
가족과 같은 집에서 살면서 변변한 대화 한번 나누지 못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는지, 누구와 친한지, 속상한 일은 없었는지, 요새 무엇이 유행인지, 등등의 소소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내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도 없고 동생들의 속내를 들어 준 적도 없다. 내가 가족들에게 준 것은 돈이 전부였다. 가족들이 야속하다고 원망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번 돈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마음을 망쳐 놓았다. 이걸 깨닫고 나니 참 부끄러웠다.
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돈 문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해결하기 쉬운 문제다. 돈보다 더 채워야 하는 건 가족 간의 사랑이고 정이다. 나의 내면아이가 자라지 못한 것도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분노와 실망감, 죄책감, 열등감을 하나씩 하나씩 걷어 내니 가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에 왜곡되지 않은 깨끗한 모습으로. 새 옷을 사드려도 늘 헌 옷을 입고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기대가 많았던 큰딸이 졸지에 미혼모가 되고 미망인이 되었을 때 손녀를 키워 주시면서 투정 한번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어머니는 내 딸의 그림자였다.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를 ‘손녀의 보디가드’라고 할 만큼 잘 챙겨 주셨다. 딸아이가 놀다가 다치면 어머니는 “어떤 놈이 그랬느냐!”며 노발대발했다. 동생들은 어머니가 자신들보다 손녀에게 더 큰 사랑을 쏟는다며 불평했지만, 밖으로 일만 하러 다니고 집에서는 잠만 자는 나 대신에 조카를 살뜰히 챙겼다. 아빠가 없었지만 할머니와 이모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딸은 잘 컸다.
딸은 자라면서 한 번도 아빠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할머니와 이모들을 통해 알고 있었고, 굳이 마음 아픈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난 아빠가 원래 없어서 아빠가 중요한 사람인지 몰랐어. 그런데 남편이 애들에게 하는 걸 보면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나한테 이렇게 해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렸을 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 주는 기간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딸은 아빠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엄마인 나 역시 제대로 사랑을 쏟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살아온 딸이 고맙고, 딸을 이렇게 강인하게 키워 주신 어머니에게 감사하다. 어머니가 딸을 키워 주고 알뜰하게 살림을 하셨기에 우리 집안도 일어설 수 있었고 동생들까지 모두 결혼해서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나를 챙겨 준 동생들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막냇동생은 내가 안과에서 뇌종양이 의심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미적거리던 나를 독촉해서 병원으로 보낸 장본인이다. 둘째 동생은 내가 잘못될까 봐 애를 태웠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내 침대에 매달리며 “언니, 꼭 나아야 돼. 나는 언니처럼 못 해. 꼭 나아야 돼.” 하며 외쳤다. 아버지가 파킨슨씨병에 걸렸을 때도 “나는 언니처럼 가족들한테 못 했으니 아버지 병수발은 내가 할게.”라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 드리고, 결혼을 앞둔 내 딸에게 집을 내주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적어도 열등감에 시달리며 상처만 토로하는 딸, 언니의 모습이고 싶지 않다. 불행한 딸, 희생했던 언니의 모습이 아니라 늘 열심히 살고 미래를 꿈꾸며 재미있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만나든 부담 없이, 반가운 사이로 잘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