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당나라 말기, 중국 전역은 민란으로 혼란에 빠졌다. 북방의 거란족은 이를 기회 삼아 독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거란족은 3년에 한 번씩 8개 부족의 우두머리 중에서 ‘가한(可汗)’을 선출해 왕으로 삼았다. 그중 질나부 출신 야율 억은 자신이 가한이 되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황제의 재임기간은 황위에 오른 순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였다. 당연히 3년마다 한 번씩 행해졌던 ‘가한 선출’은 폐지되었다. 916년, 야율 억이 초대 황제로 즉위하여 건국한 나라가 바로 요나라이다. 중국 북부를 차지한 요나라는 10~11세기, 중원을 호령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이때 요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것은 황제가 아니라 한 여인이었다. 요나라 제5대 황제 경종의 황후였던 그녀의 이름은 소작, 애칭은 연연(燕燕)이며 역사에서는 ‘승천황태후’로 기록되었다.
전연의 맹약으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다.
1004년, 승천태후는 남편 한덕양과 아들 성종을 거느리고 몸소 20만 대군을 지휘하여 송나라를 공격했다. 요나라의 군대는 승리를 거듭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하였고 군사를 일으킨 지 3개월 후, 승천태후가 이끄는 요나라의 대군은 전연에 이르렀다. 전연(오늘날의 허난성 푸양현 근방)에서 송나라의 수도 개봉(開封)까지는 하룻길이었으므로 사실상 송나라와 요나라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송진종(송나라의 3대 황제. 고량하 전투에서 패배했던 송태종 조광의의 아들)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자 전세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침체되었던 송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고조되었으나 반대로 요나라는 선봉장 ‘소달름’이 순찰을 돌던 중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사기가 한풀 꺾였다. 특별한 전투 없이 팽팽한 대치가 길어지자 요나라 측에서 먼저 은밀하게 화친을 제안했다.
사실 승천태후는 전쟁을 일으킬 때부터 화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송나라 또한 적절한 시기에 요나라가 화친을 제의한 것이 반가웠다. 몇 차례에 걸쳐 계속된 교섭 끝에 마침내 양측이 모두 만족한 가운데 평화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이 회담을 요나라에 유리한 쪽으로 이끈 최고의 주역은 한덕양이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한족의 특성을 아는 그는 요나라의 황제 성종이 송나라의 황제 진종을 ‘형’이라 부르고, 진종은 소작태후를 ‘숙모’라 부르는 조항을 추가하여 송나라와 진종의 체면을 세워주는 한편 실질적인 이익을 챙기는 데 집중했다. 빼앗았던 성지 10개를 되돌려주는 조건으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로 확정한 것이다. 요나라가 뺏은 성지는 어차피 계속적으로 영토 분쟁에 휘말려왔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어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땅이었다. 반면 이것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받는 것은 실로 막대한 이득이었다.
요나라와 송나라가 맺은 이 맹약을 ‘전연의 맹약’이라고 한다. 이 맹약으로 요나라는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요나라는 송나라에서 받은 세폐를 기반으로 재정을 정비하였고 송나라와의 무역도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조약 이후 송나라와 요나라가 약 12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양국 백성들은 이후 100년 넘게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요나라를 태평성세의 반석 위에 올려놓다.
승천태후는 송나라와의 평화를 이루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역대 어느 황제도 하지 못한 위업이었다. 그 후 승천태후는 요나라의 위엄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그것은 바로 도성을 짓는 일이었다. 그전까지 요나라는 동서남북 각각 4곳에 수도가 있었지만 별도의 도성이나 궁을 짓지 않아서 황제는 늘 임시천막에서 정무를 처리했다. 이는 유목을 근간으로 한 거란족의 특성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승천태후는 요나라가 국제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수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007년, 2년을 꼬박 걸려서 건축한 도성 중경대정부가 완성되었다. 수도 건설을 끝으로 승천태후는 섭정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했다. 성종의 나이도 어느덧 30대 중반이었다. 1009년 승천태후는 시책례(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는 요왕조의 전통의식)를 행하고 성종에게 모든 권력을 양도했다. 모든 권력을 내려놓은 승천태후는 한덕양과 함께 수도를 떠나 남경으로 향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룩한 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일까. 남경에 도착하기 전, 승천태후는 그만 세상을 떠났다. 승천태후의 시신은 그녀의 첫번째 남편인 제5대 경종 옆에 묻혔다.
승천태후의 죽음 이후 한덕양의 건강도 점차 쇠약해졌다. 이를 안타까워한 황제 성종이 손수 간호를 하고, 황후 소보살가(한덕양의 외조카)가 직접 탕약을 끓여가며 한덕양을 보살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결국 승천태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한덕양도 눈을 감았다. 한덕양의 시신은 승천태후의 곁에 묻혔다. 황릉은 황제와 황후에게만 허락된 곳이었지만 성종은 친히 국장을 치러 한덕양을 승천태후 곁에 안장하였다.
승천태후는 처음부터 정치와 권력을 열망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된 순간부터 암투에 시달렸고, 권모술수로 인해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수없이 겪으며 점차 강인해졌다. 그녀는 비록 여성이었으나 누구보다 유능한 정치가였고, 그 어떤 황제보다 뛰어난 군주였다. 승천태후 덕분에 북방의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던 거란의 백성들은 풍요로운 태평성세를 만날 수 있었다. 승천태후는 요나라가 한족에 대한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당대 최고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녀가 있었기에 요나라는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조금 더 뚜렷하게 남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