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Feb 28. 2018

04. 경쟁, 그리고 상실의 시대

<불친절한 디자인>



좀 지난 일이지만, 우연히 TV에서 [마스터셰프코리아]란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이전에 봤던 여타의 그것들과는 달리, 유난스레 거친 모습(출연자를 대하는 태도)을, 그것도 방송 내내 발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시청하는 필자 스스로가, 무안해질 정도로 말이다. ‘전문가라 불리는 저 사람들은 삶의 경쟁에 놓인 일반 출연자들에게 저리 심한 막말과 무시를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 과연 있는 것인지….’


<마스터셰프코리아>의 타이틀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TV안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대개 이런 형식의 포맷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이 출연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또한 그것이 정당한 과정임을 보여주는, 그런 가학적인 형식들을 말이다. 요즘은 미디어가 더 그런 과정을 조장하고 있다. 이유는? 바로 ‘경쟁’때문이리라. 더 자극적이고, 더 가학적이어야 시청률이 오르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우리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 ‘경쟁’이, 바로 우리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마도 그렇기에 그 프로그램을, 우린 그리도 무던하게 바라봤으리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경쟁이니 말이다.
  
  
競爭의 常道
2011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당시 TV에 조금은 파격적인 프로그램이 하나 등장한다. 이름은 바로 [나는가수다]. 필자가 뜬금없이 이 예전의 프로그램을 꺼낸 이유는, 첫 번째, 바로 그때 <나가수>에서 보여주었던 행태, 이른바 프로들의 경쟁 시스템가 지금 만연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큰 기준을 제공했다는 점, 두 번째, 그런 형식의 시스템이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경쟁을 설명할 수 있는 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나가수>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이야기들을 남겨 놓았을까?
  
2011년 당시, MBC는 심각한 예능의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간판 예능프로그램 [일요일일요일밤에]는, 부자가 망해도 3년 간다는 속담이 무색해질 정도로 급격한 하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이와는 달리 시대 흐름을 발 빠르게 포착한 동 시간대 타 방송사들은, 새로운 얼굴과 다양한 기획을 통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빠르게 사로잡아 가고 있었다. 물론 당시 MBC도 이것을 타파하고자, <일밤>의 대표 프로그램이었던 [몰래카메라]를 부활시켜 ‘이경규’를 앞세우기도, 착한 예능의 선구자였던 김영희 PD를 복귀시켜 사회참여형 착한 예능을 다시 선보이기도 했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이 역시도 도돌이표 기획이란… 비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결국 <일밤>은, 그동안 추구해왔던 예능의 길, 전통적인 방향을 접고 이른바 대대적인 개편이란 걸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개편의 간판으로 발표된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가수>였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 호평, 논란, 비난, 동정, 그리고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프로그램의 한계를 실감하며, 아주 짧은 기간의 흥망성쇠를 거친 후, TV밖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작금의 역사처럼, 사라진다고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듯 <나가수>는 이후에 생겨난, 또 그 이전 선보였던 이른바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의 기준과 방식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경쟁의 변질된 모습으로 말이다. 과연 무엇이 그런가? 우선 그것을 찾기 위해 그때의 <나가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MBC <나는가수다>


첫 번째. <나가수>는 우리가 만들어오고 지켜왔던 ‘공정’이란 심리적 선을 미디어를 이용해 재이동시켰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신뢰라 여겼던 내적인 의미를, 스스로 조작가능하다는 미디어로 새로이 정리했다는 뜻이다. 마치 지금의 만연한, 선동형 여론 프레임처럼 말이다. 과연 무엇이 그런가? <나가수>는 첫 화면부터 각계각층의, 소위 음악 전문가라는 집단을 등장시켜 이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문가 집단은 가수가 노래하는 중간에도 계속 화면 속에서, 이번에 노래하는 가수가 어떤 사람이며 왜 이곳에 나와야 하는지, 마치 그들의 대변인처럼 가수들을 끊임없이 포장하려 했다. 우습게도 첫 방송 당시 시청자 불만 중 하나는 노래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 앞서 정의해놓은 전문가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에게 권리를 주는 듯한, 청중평가라는 방식을 이용해 그 결과를 대중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내가 세워놓은 가수들을 너희들은 그냥 인정해야 돼!’라는 함의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개인의 취향이 담론화된 시대에 도대체 나이별 인원을 분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이러한 미디어의 규정방식 프레임 은 이것을 바라보는 시청자를 위한 시스템이 아닌 매체, 그리고 미디어를 움직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이후 지속적인 시청자들의 불만을 누른 채 <나가수>는 결국 미디어의 긍정적인 응원을 부르는, 좋은 프로그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두 번째, <나가수>는 우리 사회의 함의적 메시지, 모든 이에게 경쟁은 당연하다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나가수>는 심리적인 선,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기성 가수들도 피말리는 경쟁을 해야 한다는 그 선을 무너뜨림으로써, 이후에 생겨날 다양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이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나가수>도 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전문가도 경쟁을 하는데 하물며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들은?’
  
세 번째, 전문가의 존재 자체가 신격화되었다. 결과론적으로, 그 덕에 미디어를 통해 등장하는 전문가(타칭)는 이젠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 TV를 보라. 패션 프로그램 [도전! 수퍼모델코리아], 요리 서바이벌 [마스터셰프코리아], 가수 오디션 [수퍼스타K] [K팝스타], 창업 오디션 [황금의 펜타곤] 등등 거의 모든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업계의 전문가라는 심사위원들은 실제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미션과 의지를 요구하며, 마냥 독설을 날리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마치 그것이 이 세상의 정답인 듯, 더군다나 불같은 화까지 내면서 말이다.
  
| 경쟁 | (다음. 우리말 사전)
1.같은 목적에 대하여 서로 이기거나 앞서려고 다툼
2.[생물] 생물의 여러 개체가 제한된 환경을 이용하기 위하여 벌이는 상호 작용
3.생물의 개체수가 먹이의 양이나 공간의 넓이에 비하여 많아지면 생기는 현상으로,
이때 생물은 마이너스 영향을 받아 생활력이 저하되거나 사멸해 버린다.


다양한 TV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바로 몇 년 전 유명 패션디자인 회사의 인턴 급여 기사가, 세상을 조금 시끄럽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리고 나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더 그런 실망의 목소리가 많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런 일련의 일들은, 특히 디자인업계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지만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몬트리올 총영사관 무급인턴사원 모집 공고, 이랜드의 아르바이트 급여 착취 등….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가수>에서도 보았듯, 경쟁이 보편화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경쟁의 희생이 또한 당연하다는, 우리의 삶이 또한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원치 않았던, 누군가의 프레임이지만 말이다.
  
다른 것을 맛보는 것이 예술이지
일등을 매기는 것이 예술이 아니다.
_ 백남준
  
그런데 말이다. 사실 우리의 디자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길을 계속 걸어오고 있다. 경쟁PT와 시안은, 벌써… 우리의 일상이 되지 않았는가? 요즘은 그 경쟁을 위한 시안이 회사 임원을 넘어 부장, 과장 등을 위해서도 만들어진다고 하지? 이유는 윗사람이 무엇을 좋아할지 모르겠다는, 단지 그 이유에서라고…. 그래서? 그것을 위한 시간 낭비도 꽤나 많아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잠깐 돌이켜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린 우리 스스로가 지켰던 ‘선’이란 게 있었다. 바로 ‘상도의’라는 ‘선’, 기업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두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선’말이다. 아무리 경쟁 PT라도 시인비가 존재했다는 사실,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런 시장의 ‘선’, 마음의 ‘선’이 무너진 지금, 과연 우린 어떤 의미를, 아니 어떤 친절함을 소비자들에게 베풀 수가 있을까? 우리조차 안녕하기 힘든, 이 무한한 경쟁의 프레임 속에서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