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샤넬을 빼고 20세기 여성 패션을 논할 수 있을까? 샤넬은 살아생전 많은 어록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말일 것이다. 샤넬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가 남긴 샤넬의 스타일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여성들에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돌뱅이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가난한 소녀는 거대한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편안함을 기본으로 한 파격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유일무이한 패션 제국을 이룩했다. 샤넬,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샤넬은 루아얄리외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상대로 모자를 만들어주고 돈을 받았다. 샤넬의 모자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차츰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객 중에는 에티엔(샤넬의 애인)의 애인, 에릴리엔 달랑송도 있었다. 샤넬은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에 에티엔은 샤넬이 하는 일을 ‘꽤 바지런한 취미’ 정도로 여길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4년 후, 샤넬이 정식으로 모자 가게를 내고 싶어 하며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하자 펄쩍 뛰며 반대하였다. 자신의 집에서 여자친구 자격으로 머물고 있는 샤넬이 대놓고 돈을 번다는 것이 매우 망신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에티엔과 달리 샤넬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그녀에게 사업 자금을 준 남성이 등장한다. 에티엔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의 이름은 아서 카펠, 훗날 샤넬의 영원한 연인으로 남게 되는 인물이다.
영원한 연인으로 남은 두 번째 남자, 아서 카펠
“그 남자(카펠)는 정말 미남이고 매력적이었어. 단순히 잘생기고 멋진 것 이상의 남자였지. 그 무관심한 태도와 초록빛 눈이 얼마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지. 그는 고집 센 말에 올라타곤 했는데, 아주 강한 남자였어. 나는 그 남자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지.”
1908년, 샤넬은 에티엔을 따라 피레네 지방의 ‘포’로 여행을 갔다. 말과 경마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에티엔은 경주용 말을 구입하여 대회에 출전시키는 것이 취미이자 주 업무였다. 그는 경마 대회 일정에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루아얄리외에 남아 있어 봤자 별다른 일이 없는 샤넬도 대부분 동행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젊고 잘생긴 외모에 매력이 넘치는 영국남자를 만났다. 폴로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아서 카펠이었다. 에티엔과 카펠은 ‘말’이라는 공동 관심사 덕분에 순식간에 친해졌고, 샤넬은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이날의 만남은 짧게 끝났다. 그래도 사교성이 뛰어난 에티엔 덕분에 샤넬은 루아얄리외 저택에서 카펠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샤넬은 카펠이 자신의 인생에서 아주 특별한 남자가 될 것임을 느꼈다.
샤넬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고 이내 카펠과 연인이 되었다. 에티엔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독립을 하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 돈이 문제였다. 샤넬은 자신의 재능으로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소일거리로 해왔던 모자 만드는 일을 정식 직업으로 삼기 위해 에티엔에게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당연히 거절했다. 이때 카펠이 나서서 샤넬이 사업 자금을 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녀가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준 것이다. 물론 당시 카펠은 샤넬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한 여자에게 정착하기에 그는 바람둥이 기질이 너무나 다분했다. 하지만 카펠은 샤넬에게서 성공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꺼이 투자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샤넬은 에티엔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고, 카펠과 자유롭게 연애를 시작했다. 에티엔은 샤넬의 친구로 남았다.
1910년 샤넬은 캉봉 거리 21번지 2층에 있는 커다란 작업실을 빌려 모자 가게를 오픈했다. ‘샤넬 모드’의 첫 시작이었다. 당시 여자들은 리본과 꽃 등으로 장식한 화려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하지만 샤넬은 검정색을 기본으로 한 심플한 디자인의 모자를 만들었다. 샤넬의 모자는 처음에 빈곤해 보인다는 이유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이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에티엔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인 달랑송은 샤넬 모자의 홍보 모델을 자처했고 유명한 여배우가 그녀의 모자를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에서 착용하고 나오면서 사업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카펠은 단순한 투자를 넘어 샤넬이 사업가로 성장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샤넬은 야심만만하고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재능도 빼어났지만,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지성과 교양, 인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샤넬이 장차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배울 수 있도록 조언했다. 샤넬은 먼저 패션 전문가인 마드모아젤 생퐁에게서 패션 용어를 비롯해 상류사회에 필요한 화술과 교양 등을 배웠다. 모자가게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주 고객이 될 상류사회의 여성들을 대할 때 필요한 매너를 머리로, 몸으로 익혀나간 것이다. 샤넬은 이때 배운 매너와 기술을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처럼 평생에 걸쳐 유용하게 사용했다. 또한 카펠은 그녀가 예술계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경영에 대한 부분은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 후, 샤넬은 카펠에게 빌린 투자금을 모두 갚고도 남을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1차 세계대전과 사업의 급성장
“보이(카펠의 애칭)는 내 인생의 커다란 행복이었어요. 내게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남자. 그는 강인한 인격의 소유자였지요. 그는 나를 만들었어요, 내 속에서 독특한 부분들을 살려내고 덜 자란 부분들이 성숙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지요.”
캉봉 거리의 ‘샤넬 모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샤넬은 카펠과 함께 도빌로 휴가를 떠났다. 파리에서 가까운 해변에 위치한 도빌은 휴가철이면 부유한 상류층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패션의 최첨단을 걷는 곳이기도 했다.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 자체가 처음이던 샤넬은 이곳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1913년, 샤넬은 카펠이 지원한 거액의 투자금을 받고 도빌에 자신의 첫 번째 패션 부티크(의상실)를 오픈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샤넬이 디자인한 단순하고 편리한 옷과 소품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도빌의 유행을 주도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바느질을 배우긴 했으나 정식으로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던 샤넬은 스케치를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녀의 작업 방식은 모델에게 가봉을 한 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가위질과 바느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샤넬은 일을 할 때면 지칠 줄을 몰랐지만 7~8시간씩 온몸을 긴장한 채 서 있어야 하는 모델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덕분에 샤넬의 의상은 인체의 동선을 완벽하게 고려하여 완성되었고, 아무리 오랫동안 입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 되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샤넬의 디자인은 당시 부르주아 여성들로부터 ‘푸어룩(Poor look)’이라고 불리곤 했다. 이 말에는 간결하고 소박하며 실용적이고 편안한 그녀의 의상을 빈정거리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샤넬은 모든 여성들이 선망하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샤넬은 살아생전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녀의 말 속에 답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럭셔리의 반대말은 빈곤함이 아니라 천박함이다. 진정으로 럭셔리한 스타일이라면 편안해야 한다. 편안하지 않다면 럭셔리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