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한 디자인>
1948년, 미국 대법원은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수직적 계열화(제작, 배급, 상영을 통합 운영하는 것)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파라마운트 판결’이다. ‘파라마운트 판결’은 한마디로, 영화사는 영화관을 직접 가질 수도, 또는 운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판결로 인해 당시 미국영화를 주도하던 5개의 메이저 영화사는 극장을 소유할 수 없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 판결은 당시 꽤나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이미 영화 시장(당시의) 자체에 많은 악재 요소가 겹쳐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 비용의 증가, TV로 인한 관객 감소, 해외 시장에서의 수익 감소 등, 결국 이 판결로 인해 당시 많은 영화사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란 악재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지금, 이 판례가 과연 거대 영화사를 무너뜨린, 악법으로만 남아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사 파라마운트는 지금도 메이저이자 다수의 독립 영화까지 제작하는, 굴지의 영화 회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점이다. -위키백과-
그렇다면 왜 이런 판결이 나왔을까? 그것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에서 말이다. 이유는 제작사 또는 배급사가 영화관을 운영할 경우, 당연히 수익을 위해 그들이 만든 영화만을 계속 상영할 것이고, 이러한 문제는 결국 다양하고 실험적인 창작의 토양, 즉 영화의 창의성이란 바탕이 결국 자본에 의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판결과 더불어 미국의 영화관은 이 판결을 더욱 강화하는, 아주 독특한 이윤 추구의 방법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영화를 장기 상영하면 할수록 영화관의 수입이 더 많아진다는 ‘제도’ 말이다. 해서 영화관은 당연하게도 신작영화보다 장기상영 영화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의‘제도’는 모두 일정한 하나의 방향으로 할리우드의 영화의 제작을 유도하게 된다. 좀 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도록 말이다. 그리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 할리우드의 영화는 재미와 감동, 아니 그것을 넘어 새로운 창의의 장으로 우리의 세상을 이끌고 있다. 너무나도 상업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로도 말이다.
原因과 結果
‘제도’라는 것이 있다. 규제를 하는 것, 또는 규제를 푸는 것, 모두 제도란 틀 안에 있다. 하지만 이 제도라는 것, 이것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만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의 환경에서는 말이다. 제도의 대상이, 과연 누구를 향했느냐에 따라…. 그런 의미에서, 7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미국의 이 제도는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을 향했다는, 그 하나의 의미에서라도 말이다.
| 제도 | (다음. 우리말 사전)
법이나 관습에 의하여 세워진 모든 사회적 규약의 체계
음료의 점자표시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모든 캔의 음료는 음료로만, 맥주는 맥주로만 표기되어 있다고. 이유는 예상하다시피 돈 때문이다. 제도 역시 권고일 뿐 의무가 아니었기에. 그렇다면 이 점자는, 과연 누구를 위해 새겨진 것일까?
| 취재파일 | SBS 뉴스
<사이다야 콜라야? 이름 없는 ‘음료’에 소비자 분통>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물이나 산소처럼 모두에게 필요한 게 있습니다. 반면에 누군가에겐 필요 없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것들도 있습니다. 캔 음료 뚜껑 쪽에 새겨놓은 점자와 관련된 얘기입니다. 한 번쯤은 그 올록볼록한 문양을 보거나 만져보신 적 있을 겁니다. 바로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한 점자입니다.
캔음료의 점자 표시
알고 보면 캔 음료도 종류가 정말 많습니다. 탄산, 이온, 커피, 과즙 등등…. 각 품목별로 제품은 더욱 다양하고요. 하지만 캔 뚜껑 위에 새겨진 점자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음료> 사이다도 ‘음료’, 콜라도 ‘음료’, 게토레이도 ‘음료’, 포카리스웨트도 모두 ‘음료’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과연 시각장애인들은 자신이 마시고 싶은 ‘음료’를 제대로 선택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저는 최소한 이 자리에서만큼은 사회적 약자인 시각장애인을 위해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뭐 이런 맥락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보건복지부에 공식 등록된 시각장애인 25만 명을 과연 식음료 제조사가 소비자로 바라보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으니까 그 많은 업체 중에서 단 한 군데도 제품명을 점자로 써놓은 곳이 없겠죠.
업체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음료 시장에서 덩치가 제법 큰 롯데칠성음료, LG생활건강이 인수한 한국코카콜라 그리고 덩치는 작더라도 ‘스테디셀러’제품을 갖고 있는 웅진식품의 말을 종합하면‘돈’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기존 생산라인을 조금씩 바꿔야 하고, 관리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합니다. 캔 뚜껑 위의 공간이 좁아 제품명을 쓸 수 없다는 다소 구차한 변명도 있었지만요. 만에 하나 생산 과정에서 점자로 사이다라고 돼 있는 캔에 커피를 담게 되는 실수가 나오면 업체 입장에서는 심각한 항의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이죠. 득보다 실이 많은 상황에서 그나마 선한 행동의 결과로 타격을 받는다면 누가 책임질 거냐는 항변도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침마다 이메일을 열면 업체들이 보낸 보도 자료가 넘쳐나거든요‘. 서울대생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라며 권위에 기댄 자료가 있는가 하면, 소비자들이 기다리던 신제품을 출시했다며 엠바고(보도시점을 사전에 정함)까지 요청하면서 기자들을 유인하기도 하고요. 툭하면 ‘감사 세일’에 연말연초마다 ‘임직원 연탄배달 봉사’등등의 보도 자료도 단골 메뉴입니다. 브랜드를 자주 회자시켜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일 텐데, 그렇게 제품을 알려서 소비까지 이어지게 하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닙니다. 바로 캔 음료 뚜껑 위에 ‘음료’라는 점자가 아니라 제품명을 점자로 새겨놓으면 어떨까요? 그 25만 명의 시각장애인들에겐 그 어떤 홍보보다 머리에, 가슴에 남을 것 같은데요. 자신들의 불편과 불만을 해소해준 기업에 그들은 그 어떤 부류보다 가장 충성스러운 소비자가 될 것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이런 얘기들을 하더군요. “가게에 들어가서 그냥 캔 커피 아무거나 달라고 부탁해요.”, “ 광고를 듣고 제품 이름을 외웠지만 다 ‘음료’라고 점자로 돼 있어서…. 점원한테 부탁하기도 미안하고요. 못 먹었어요.”, “그냥 안 먹어요.” 지금 식음료 업체들은 25만 명의 잠재적 소비자를 눈 뜨고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디자인이 삶 속에 들어온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디자인엔 과연 무엇이 담겨 있을까? 경쟁과 돈,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새겨져 있을까? 정말로 사람을 향한다는 한 기업의 광고카피처럼, 과연 우린 언제쯤 사람을 향한 디자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디테일이 디자인을 만든다.
_ 찰스 앤 레이 임스(Charles & Ray Eames)
*2014년 4월 기사를 보니 팔도의 캔 음료 전체에 제대로 된 점자가 적용된다고.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사가 나오고 1년 후…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나 보다. 기술의 발전만큼 꼭 세상이 빨리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물론 소비자를 향한, 그 일에서만큼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