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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06. 2018

04. 마르그리트 뒤라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다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나는 사랑을 사랑했고 사랑하기를 사랑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943년 첫 소설을 발표한 뒤라스는 죽는 날까지 글을 썼다. 글쓰기와 작품은 그녀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뒤라스는 첫 소설을 출간한 후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썼고, 장장 수십 년 동안 평단의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은 문제적 작가였다. 하지만 오늘날 뒤라스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뒤라스의 나이 일흔이 넘어서였다. 뒤라스의 삶은 상식적인 기준에서 바라보았을 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을 당혹시킨 것은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 뒤라스가 이십대의 젊은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뒤라스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소설들은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불행한 가족사

세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졌을 때, 뒤라스의 어머니는 38살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고 여자로서의 삶은 아예 포기했다. 그녀는 계속 교사로 일하고 개인교습도 하면서 꿋꿋하게 세 아이를 키웠다. 극장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기도 했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인도차이나에서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려면 강해져야 했다. 하지만 6년 후, 결국 그녀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프놈펜 생활을 정리하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갔다.

생활은 점점 가난해져갔지만 뒤라스의 어머니는 꿈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10년 동안 악착같이 일하며 절약한 돈으로 토지불하(국가 또는 공공 단체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 신청을 했다. 그리고 2년을 기다려 100헥타르(약 30만평)의 땅을 불하받는다. 이 땅에는 그녀와 자식들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부패한 토지 관리국 직원들이 배분해 준 땅은 우기가 되면 바다에 잠기는 땅이었다. 제대로 된 땅을 받으려면 뇌물을 바쳐야 했지만 그녀는 이를 알지 못했고, 알았다 해도 뇌물로 줄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땅을 받은 첫 해, 뒤라스의 어머니는 풍작을 꿈꾸며, 부자가 되기를 꿈꾸며 농작물을 심었다. 하지만 우기가 오자 거센 파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무리 항의를 해도 토지 관리국 직원들은 나 몰라라 할 뿐이었다.

이듬해에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뒤라스의 어머니는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 위해 방파제를 쌓기로 결심한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프랑스인들에게 쓸 만한 땅을 모조리 빼앗긴 채 그곳으로 밀려난 원주민들이 그녀의 계획에 동참했다. 뒤라스의 어머니는 원주민들과 함께 몇 개월에 걸쳐 방파제를 쌓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우기가 되자 방파제는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녀는 이 충격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결국 뒤라스의 가족에게 남은 전 재산은 바닷물이 닿지 않는 5헥타르(약 1만 5천 평)의 땅이 전부였다.

뒤라스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어머니 그리고 두 오빠들과 함께 살았다. 방파제를 쌓아도 태평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라스의 어머니는 삶의 목표를 잃었고, 장남 피에르에게 그녀의 모든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피에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보다 약한 동생들을 괴롭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피에르는 폭군이 되어갔다. 어머니의 편애를 받는 포악한 큰 오빠의 횡포를 견뎌야 했던 뒤라스는 작은 오빠에게 의지하며 그 시절을 견뎌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큰오빠에 대한 분노는 커졌고 이를 방관하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도 높아졌다. 뒤라스가 겪고 있는 모든 부당함의 원인은 큰 오빠만을 편애하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라스가 어머니를 싫어하거나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뒤라스가 간절하게 바란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오직 큰아들에게 집착할 뿐이었다.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불의와 외로움을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뒤라스는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냉소적인 소녀로 성장했다. 자존감은 한없이 강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거나 사랑하는 방법은 모르는 아이가 된 것이다.


파리에서의 새로운 출발

뒤라스는 12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으나 번번이 무시당했다. 어머니는 뒤라스가 수학교사나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최고의 직업이었고, 최상의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뒤라스는 대학에서 법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공부보다 그녀를 더 매료시킨 것은 문학이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독서 경험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으나 파리는 달랐다. 뒤라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커다란 대학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었고, 아예 극장에 고정관람권을 끊어놓고 공연되는 모든 연극을 보았다. 인도차이나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역시나 뒤라스는 고독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기도 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삶과 파리에서의 모든 경험은 훗날 그녀가 작가가 되는 데 토양이 되었다.

1937년, 23살의 뒤라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식민성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안정적인 직업을 얻은 것이다. 식민지에서 나고 자란 뒤라스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고 2년 사이 월급도 두 번이 인상되었다. 2년 후에는 법대에서 만난, 3살 연하의 로베르앙텔므와 결혼했다. 뒤라스의 인생에서 남들이 보기에도 딱히 비난할거리가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했던, 지극히 드물게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던 시기였다.

1940년, 뒤라스는 필립 로크와 함께 갈리마르 출판사(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식민지 정책을 실천에 옮긴 인물들에 대한 찬사와 프랑스 식민지 정책에 대한 찬양과 경의로 가득 찬 <프랑스 제국>을 출간했다. 어려서부터 줄곧 식민지 체제 자체를 거부하고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를 경멸해왔던 뒤라스의 이러한 행보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프랑스제국>은 ‘뒤라스’라는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性)인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책이긴 했으나 어쨌거나 뒤라스가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책이었다. 훗날 그녀의 전기를 쓴 작가 알랭 비르콩들레는 이에 대하여 ‘아버지의 이름(도나디외)을 완전히 던져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는 행위였다’고 이해했다.


전쟁의 상처 그리고 작가 데뷔

1940년, 뒤라스가 프랑스와 정부를 찬양하는 <프랑스 제국>이라는 책을 출간한 바로 그해, 그녀는 해고를 당했다. 전쟁(제2차 세계대전.)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잃은 것이었다. 짧게나마 어머니가 원하는 삶을 살았던 뒤라스는 이로써 안정적인 삶과 완전히 작별하였다. 같은 시기,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 군인들이 파리 시내를 활보하고, 유태인들은 가슴에 노란 별을 달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러던 중 1942년, 뒤라스는 첫 아이를 잃었다. 전쟁 중이라 차량들이 독일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뒤라스는 절망하였고 슬픔에 잠겼다. 설상가상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가족, 작은 오빠가 인도차이나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군이 점령한 사이공에서 폐렴에 걸린 뒤라스의 작은 오빠는 약품 부족으로 목숨을 잃었다. 첫 아이와 작은 오빠의 죽음으로 뒤라스는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고, 이 사건은 그녀에게 평생의 상처로 남았다.

아들과 오빠의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슬픔을 견디기 위해 뒤라스는 글을 썼다. 1942년, 뒤라스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타네랑 가족’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소설을 완성했다.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다. 뒤라스는 이 소설을 갈리마르 출판사에 보냈다. 출판사에서는 뒤라스의 역량은 인정하였으나 소설의 출판은 거부했다. 그러자 뒤라스의 남편 로베르 앙텔므는 자신이 아는 출판사의 지인에게 이 원고를 가져갔다. ‘만약 이 책이 출판되지 못하면 나의 아내는 아마 자살을 할 것’이라며 아내의 출판을 위해 애쓴 앙텔므 덕분에 1943년, 뒤라스의 첫 번째 소설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제목은 ‘타네랑 가족’에서 <철면피들>로 수정되었다.

두 번째 소설 <평온한 삶>은 1944년 갈리마르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기 뒤라스는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남자를 만난다. 바로 갈리마르사의 원고 선정인인 디오니스 마르콜로가 그 주인공이다. 같은해, 뒤라스와 그녀의 남편 로베르 앙텔므 그리고 디오니스 마르콜로 세 사람은 프랑수아 미테랑이 창설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6월 1일, 로베르 앙텔므는 게슈타포(독일 나치(Nazi) 정권의 비밀국가경찰이다. 독일은 물론이고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나치 반대 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하고 유대인을 학살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나치 체제를 확립하는 활동을 했다.)에 의해 체포된다.

뒤라스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과 고통, 분노와 공포에 시달렸다. 그녀는 남편의 생사를 알아내기 위해 사방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프랑스 국민들과 파리시민들이 환호하고 있을 때, 뒤라스는 남편의 실종으로 인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패배가 확실해지면서 초조해진 독일군이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5년 4월, 연합군의 승리로 전 유럽이 기쁨에 휩싸였을 때도 뒤라스는 여전히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해 넋이 나가 있었다. 독일군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자행한 끔찍한 학살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

다행히 프랑수아 미테랑의 도움으로 뒤라스는 남편이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서 독일에 최초로 개설된 곳이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다하우 수용수는 미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는데 장티푸스가 만연하여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시체더미 사이에서 시체와 다름없는 몰골을 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던 로베르 앙텔므를 발견한 미테랑은 미군들의 눈을 피해 그를 극적으로 구출해냈다. 파리로 돌아온 남편을 본 뒤라스는 경악했다. 178cm의 키에 건장했던 앙텔므는 몸무게가 40kg도 나가지 않는, 해골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혼 그리고 왕성한 활동

뒤라스는 정성을 다해 사경을 헤매는 남편을 간병했고 그의 회복을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앙텔므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자 이혼을 요청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앙텔므는 뒤라스와 이혼한 후에도 평생 우정을 유지했다. 뒤라스에게 그는 기억에 없는 아버지이자 든든한 보호자였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뒤라스가 남자로서 원하는 사람은 앙텔므가 아니라 디오니스 마르콜로였다. 누구보다 뒤라스를 잘 알았던 앙텔므는 뒤라스의 이혼선언을 받아들였다. 1946년, 뒤라스는 앙텔므와 정식으로 이혼하였고 이듬해 디오니스 마르콜로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 마르콜로를 낳았다.

1950년, 뒤라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소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를 발표했다. 소설은 발간 즉시 화제가 되었고 발간 첫 주에 5천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자행한 온갖 만행들을 고발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가 식민지이던 인도차이나 3국의 재지배를 위하여 일으킨 전쟁(1946∼1954). ‘인도차이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가리키며 지금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해당한다.)을 시작했다. 뒤라스는 강력하게 정부를 비난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지브롤터의 뱃사람>, <타르키니아의 망아지들>, <나무 위에서의 나날들>, <왕뱀>, <도댕부인>, <공사장>, <길가의 작은 공원> 등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문단에서의 입지도 점점 단단해져갔다.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알제리 전쟁을 시작했다. 식민지 체제의 몰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악이었다. 이번에도 뒤라스는 정부를 비난하며 알제리 독립군 게릴라들을 도왔다. 1955년 가을, 뒤라스는 ‘알제리 전쟁 반대를 위한 지식인들의 모임’을 창립했다. 뒤라스를 비롯한 의식 있는 지식인들과 학자,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한 이 모임은 ‘프랑스 국내 및 해외 영토에서의 인종차별 금지’를 주장하였고 폭발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뒤라스는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프랑스 옵세르바퇴르>지에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과 이를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동감 넘치는 소설로 써냈다. 문학은 실로 큰 힘이 있었다. 독자들은 뒤라스의 글을 통해 차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모든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은 작가이자 가진 것 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끌어안아준 작가였다. 그녀는 때때로 너무나 난해하고 파격적인 이야기로, 시대를 앞서나간 도전으로, 예측할 수 없는 행보로, 입이 떡 벌어지는 스캔들로 비난을 받곤 했다.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뒤라스는 결코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지 않았다. 난해하고 파격적이고 입이 떡 벌어지는 스캔들로 채워진 뒤라스의 삶이 곧 그녀의 작품이었다. 고통을 마주 볼 용기가 있었던, 고통 속에 가려진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던 그녀는 인기를 누리거나 사랑을 받은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뒤라스는 작품을 통해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했고, 그녀의 나이 일흔이 넘어서 완성한 작품으로 끝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뒤라스는 고통이 아무리 길고, 끝없이 깊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면 결국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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