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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08. 2018

05. 퀴리 부인, 인류에게 방사능을 선물하다.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1903년, 피에르 퀴리는 앙리 베크렐(형광, 광화학 등을 연구한 알렉산더 베크렐의 아들이자 프랑스의 물리학자. 최초로 방사선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3년 퀴리 부부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과 함께 방사능 물질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 후보로 지명되자 스웨덴의 동료에게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다.
  
“만약 유력한 후보자로 저를 생각하신다면, 방사능 물질에 대한 우리의 연구에 비춰 봤을 때 제 아내 마리 퀴리도 마땅히 후보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세 명이 되었다. 방사능 물질을 최초로 발견한 앙리 베크렐과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함께한 퀴리 부부가 그 주인공이었다. 스위스 왕립 아카데미 의장은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퀴리 부부는 바로 그 본보기입니다.”
  
피에르 퀴리가 좋은 배필을 얻은 것일까, 마리 퀴리가 좋은 배필을 얻은 것일까? 따져볼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 부부이자 천생연분이었다. 마리 퀴리는 확실히 특별한 재능과 열정을 지닌 여인이었다. 하지만 피에르 퀴리가 없었다면, 피에르 퀴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인생이 오늘날 알려진 것처럼 빛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공부를 향한 열망과 언니 브로냐와의 약속
  
폴란드의 청소년들은 김나지움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일찍이 공부에 뜻을 세운 마냐는 언니 브로냐와 함께 이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머리를 맞댄 자매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한 사람이 파리로 공부를 하러 가고, 다른 한 사람은 폴란드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었다. 먼저 공부한 사람이 학교를 마치고 취업에 성공하면 남은 사람의 학비와 생활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언니 브로냐가 먼저 파리로 떠났다.
  
마냐(마리 퀴리)는 돈을 벌기 위해 숙식이 제공되는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다. 시골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1886년, 19살의 마냐는 사탕무 농장주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가기 위해 집을 떠났다. 파리에 도착한 브로냐는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훗날 마냐가 파리에 왔을 때 그녀의 학비를 지원해줄 만한 직업을 갖기 위해서였다. 마냐는 2년 동안 시골에 틀어박혀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했다. 2년 후, 고용계약이 끝나자 마냐는 바르샤바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만 했기에 가정교사 일은 계속했다.
  
그렇게 4년 동안 마냐는 언니 브로냐의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바쳤다. 1890년, 브로냐는 같은 학교 학생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소식과 함께 마냐에게 파리로 올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마냐는 수년 동안 가정교사로 일했을 뿐 공부는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자존감과 자신감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눈앞에 기회가 왔지만 마냐는 잠시 망설였다. 과연 자신이 파리에 가서 공부할 수 있을지 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1년 후, 마음을 다잡은 마냐는 4등석 열차를 타고 마침내 파리로 떠났다. 마냐의 커다란 짐바구니에는 침구류와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파리에서의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수학과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다.
  
파리에 도착한 마냐는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그녀는 ‘마냐’라는 폴란드 이름 대신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라는 이름으로 자연 과학부에 등록했다. 당시 파리는 유럽 각국의 가난하고 똑똑하며 야심과 열망이 가득한 유학생들로 넘쳐났다. 마냐 아니, 마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마리는 언니 브로냐의 집에 잠시 얹혀살다가 이내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와 가까운 곳에 방을 구했다.
  
당대 소르본 대학 자연과학부에는 최고의 학자들이 교수로 있었다. 지식에 목말라 있던 마리는 황홀한 학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지닌 동급생들 또한 좋은 자극을 주었다. 마리는 밤낮없이 공부에 열중했고 2년 후인 1893년, 물리학 리상스(licence(리상스): 석사학위, 석사자격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마리는 파리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과 바르샤바로 돌아가 조국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파리에 살면서도 그녀는 홀로 계신 아버지와 조국 폴란드에 대한 그리움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친구의 주선으로 물리학 리상스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마리는 600불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이 장학금 덕분에 그녀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을 더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894년, 마리는 소르본 대학 수학 분야의 리상스시험을 치렀고 차석을 차지했다. 폴란드인 물리학자인 조발스키는 마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였고, 이때 그녀에게 한 남자를 소개시켜주었다. 물리학에 이어 수학 석사학위를 받은 1894년 봄, 마리는 자신의 운명이 될 피에르 퀴리와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마리는 27살, 피에르는 35살이었다.

마리 퀴리(좌)와 피에르 퀴리(우)



  
젊고 가난한 과학자 부부
  
결혼 후 마리는 파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피에르의 월급만으로 생활을 꾸렸으나 생활은 빠듯했다. 마리는 취업에 유리한 스펙을 쌓기 위해 고급교사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이 자격증이 있으면 고등학교 교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피에르와 마리 두 사람 모두 연구만으로 생활할 만큼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이다. 1896년, 마리는 고급교사자격증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1897년 12월, 첫 딸 이렌느를 낳았다.

퀴리 부부와 첫 딸 이렌느


아내에 이어 엄마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마리는 살림과 육아에 매몰된 삶을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과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업적을 남기고 싶었다. 육아의 짐을 덜어준 사람은 시아버지 유진 퀴리였다. 손녀딸 이렌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를 잃은 그는 퀴리 부부와 살림을 합쳤고, 이렌느를 돌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가정부나 유모를 둘 형편이 아니었던 마리에게 시아버지는 최고의 지원군이었다.
  
딸이 태어난 후, 마리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녀는 연구 주제로 다른 과학자들이 아직 발을 들여놓지 않은, 가능성이 충분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싶었다. 이때 그녀의 눈에 앙리 베크렐의 논문이 들어왔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방사선에 이끌렸다.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려면 실험실이 필요했다. 이 문제는 피에르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EPCI에 부탁하여, 비록 열악하긴 하지만 마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창고를 얻어 주었다.


실험실의 퀴리 부부


마리는 EPCI의 강사도 직원도 아니었지만 날마다 피에르와 함께 매일 실험실로 출퇴근했다. 회사를 위해서 연구를 해야 하는 피에르와 달리 그녀는 오직 자신의 논문을 위한 실험에 매달렸다. 이때 마리의 실험에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피에르와 자크 형제가 발명한 기구 ‘압전기 석영 전위계’였다. 이 기구는 그때까지 나온 어떤 도구보다 전류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마리는 피에르와 함께 이 기구를 통해 표본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을 시작한 지 몇 주 후, 마리와 피에르는 여러 물질이 혼합된 ‘역청 우라늄광’이 주변 공기를 전도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으며, 이 힘이 순수 우라늄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898년 4월, 마리와 피에르의 연구 결과는 마리의 스승 가브리엘 리프만(1845~1921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모세관전기계를 발명하였고 컬러사진법을 고안하였다. 이밖에 무정위전류계, 가속도지진계 창안 등의 업적이 있다.)에 의해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되었다. 3개월 후, 마리는 아직 새로운 원소인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우라늄보다 활성이 큰 새로운 ‘물질’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녀는 이를 사촌에게 알려 바르샤바의 월간지에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실었다. 마리와 피에르는 이 물질이 새로운 원소로 인정될 것을 예상하여 ‘폴로늄’이라는 이름도 미리 붙여두었다. 마리의 조국 폴란드를 딴 이름이었다.
  
당시 모든 화학자들의 꿈은 ‘새로운 원소의 발견’이었다. 첫 연구 결과를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마리와 피에르는 그 꿈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마리와 피에르는 역청 우라늄광에서 활성이 높은 또 하나의 물질을 찾아냈다. 마리와 피에르는 이 새로운 물질이 강력한 방사선(radiation)을 방출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라듐(radium)’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에 대한 논물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했다. 이때 마리와 피에르는 폴로늄은 우라늄보다 방사능이 400배 강하며, 라듐은 무려 900배가 강하다고 보고했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실제로 라듐의 방사능은 우라늄보다 1백만 배 강하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마리와 피에르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마리와 피에르는 1903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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