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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소중한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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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분파인 수피파의 우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보 현인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din)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루는 물라가 길거리에 엎드려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데, 친구가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뭘 찾고 있는 거야?”
“열쇠를 잃어버렸어.”
“저런, 나도 함께 찾아볼까? 그런데 어디쯤에서 잃어버렸지?”
“우리 집에서.”
“뭐?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있는 거야?”
“여기가 더 환하거든.”

우스꽝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해답은 내 안에 있는데 빛이 비쳐서 잘 보이는 저 바깥세상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나가서 열심히 찾아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내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나만이 해답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짐을 싸 들고 자기 자신한테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가슴이 철렁할 만큼 깜짝 놀랄 준비를 해야 할 겁니다.

‘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네팔의 산꼭대기로 달려간다고 칩시다. 네팔이라는 신비로움이 시들고 난 다음에 거울을 쳐다보면 누가 보일 것 같습니까? 그 속에 버티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나일 뿐입니다. 단점도 많고 무서움도 많고 혼란스럽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사람, 바로 나입니다.

이제는 있음 직한 곳을 찾기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소중한 건 저 너머에 있지 않습니다. 소중한 건 모두 다 내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안은 무섭고 어둡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교육을 받아오면서 ‘나’를 주제로 한 수업을 과연 얼마나 받았습니까? 기껏해야 수학이나 배웠겠죠. 수학이 하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수학을 몰라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물론 수학을 알면 나쁠 게 없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알면 더욱 편하고 좋습니다. 하지만 설령 글을 모른다고 해도 즐겁게 살 수는 있습니다.

글을 배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몇 년을 투자해서 글을 배워놓고는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사회에 나와 1년에 책을 평균 한 권 정도밖에 안 읽는다고 합니다.

인생을 다루는 수업도, 사랑을 다루는 수업도, ‘외로움을 어떻게 이길까?’ 같은 강의도 없습니다. 이런 걸 가르치겠다고 했다가는 덜떨어진 인간 취급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도서관으로 가서 종교 서적을 모조리 쌓아놓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공통점이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라실 겁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알고 싶거든 네 안을 들여다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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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성서에도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코란에서도, 도교에서도, 세상의 모든 종교가 모두 이렇게 가르칩니다. 바깥으로의 여행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국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될 뿐입니다. 나에 대한 해답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할까요?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육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인생의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세상에는 치약만 해도 수천 가지나 됩니다. 샴푸는 또 어떻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평범한 비누로 머리를 감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드러운 머리용, 뻣뻣한 머리용, 가는 머리용, 잘 빠지는 머리용에다 헹굼용에, 대머리용까지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어린이, 유아, 성인, 노인별로 모발 보호제가 다릅니다. 한 식구끼리 모발 보호제를 나눠 쓸 수도 없습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에 이제는 질리지 않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인간이 만든 물건들의 노예가 되어 마치 기계처럼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입니다. 그런 다음 옷을 갈아입어야 출근을 할 수 있습니다. 퇴근을 하고는 이 절차를 거꾸로 반복합니다. 아침에 입었던 걸 모두 벗은 다음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입습니다.

혹시라도 냄새를 없애주는 향수를 뿌리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향수를 뿌려야 안심하고 사람들 틈에 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향수를 뿌립니다. 육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가장 소중한 걸 담고 있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소중할까요? 우리는 보통 배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배움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는 걸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배웁니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지식으로 머리를 채우느라 평생을 허비합니다. 하지만 이 지식이라는 것도 대부분 쓸모없는 고정관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고정관념에마저 중독되어버렸습니다. 뭔가 새로운 게 들어올라치면 이 고정관념, 즉 시대에 뒤떨어진 쓸모없는 지식의 검열을 거쳐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
“지금의 당신은 진정한 당신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당신입니까?”

사람들은 서로를 틀에 가두느라 평생을 허비합니다. 그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 손을 잡고 장을 보러 나선 길에 친구를 만난 엄마가 이런 말을 한다고 칩시다.

“이 아이는 멍청해. 형은 똑똑하기만 한데! 하지만 똑똑한 아이만 키울 수는 없는 거겠지? 어쨌든 못된 아이는 아니야. 속을 썩이지는 않으니까.”

도대체 이 엄마는 아이를 세워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이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인간은 늘 서로가 서로를 가르칩니다. 인간은 모두가 선생님이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학력에 관심 없습니다. 무지한 건 서로 마찬가지니까요. 우리는 근사한 딱지를 달고 있는 사람을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석사니, 박사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똑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알려드릴까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박사 학위를 달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박사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만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그 창문을 통해 바라보려고 하면 지식은 삶을 꽁꽁 묶는 족쇄가 될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고여 있어서는 발전을 할 수도 달라질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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