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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12. 2018

03. 금융혁명과 ‘아일랜드 정체성’

<동화경제사>



‘아일랜드인’ 스위프트는 뼛속 깊이 영국을 증오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제아무리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는 해도, 스위프트를 곧장 영국에 맞서는 ‘아일랜드의 상징’인 양 단순화하는 건 다소 무리가 따른다. 가톨릭에 극단적 거부감을 보였던 스위프트와 가톨릭에 기댄 대다수 아일랜드 주민들 사이에는 애초부터 넘기 힘든 장벽이 존재했다. 아일랜드 사회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당시 아일랜드 주민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뉘었다.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던 하층 농민집단(가톨릭), 북부지역의 중간계층(장로교), 그리고 소수인 상류 지주계층(영국 국교회). 둘째와 셋째 집단은 주로 영국이 아일랜드를 정복한 뒤 옮겨온 ‘정착민’의 후손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아일랜드의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실권을 장악한 셋째 집단은 전형적인 ‘앵글로-아이리시(Anglo-Irish)’, 한마디로 ‘몸은 아일랜드에, 머리는 영국에’ 둔 사람들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아일랜드인으로서 정체성 역시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 정착민의 후손으로 영국 국교회에 충성했던 스위프트의 뿌리는 원래 이 부류에 잇닿아 있었다.
  
명예혁명(1688년) 이후 20~30년간은 영국은 물론이려니와 아일랜드 역사에도 결정적 국면이었다. 1667년에 태어나 1745년까지 살다 간 스위프트가 생애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때는 이 시기와 절묘하게 겹친다. 영국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명예혁명은 의회가 주축이 되어 가톨릭 부활을 꿈꾸던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메리 공주와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 공 윌리엄 부부에게 왕위를 ‘평화적으로’ 넘긴 역사적 사건을 일컫는다. 흥미로운 건, 세계 역사상 혁명이란 단어가 붙은 사건 가운데 경제가 번창하고 풍요로운 시절에 발생한 경우는 명예혁명을 빼곤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은 풍작이 내내 계속되었고 무역흑자는 수북수북 쌓여갔으며, 특히 신흥 금융기법으로 무장한 돈 많은 신교도들이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잇달아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영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이 와중에 국가채무에 대한 의회의 지급보증(1693년), 발권력을 지닌 영란은행 설립(1694년), 재무성 채권 발행(1696년), 런던증권거래소설립(1698년) 등의 조치가 잇따랐다. 금융의 역사에서 볼 때 하나같이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다. 명예혁명의 맨 얼굴은 ‘금융혁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걸리버 여행기』 제2부에서 브로브딩낙 왕은 걸리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국가 재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에서다. “영국의 조세수입이 연간 500만 파운드에서 600만 파운드 정도 된다고 하더니 지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배가 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냐?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영국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파산할 수도 있다는 결론인데, 영국이란 나라의 채권자는 누구이며, 그들에게 갚을 돈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하는가?”
  
현대사회 국가채무의 본질을 꿰뚫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금융혁명이란 말 속에 담겨 있다. 명예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오렌지 공(윌리엄 3세)은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을 마련하고자 묘안을 짜냈다. 돈 많은 런던의 금융업자들한테서 금 120만 파운드를 빌리면서 특별한 조건을 제시한 것. 정부가 이자만 물고 원금은 영원히 갚지 않는 대신, 그들에게 은행(주식회사)을 설립할 권한을 주고 앞으로는 이 은행이 인쇄한 ‘종이(은행권)’만 국가화폐(법정화폐)로 쓰겠다는 내용이다. 독점적 발권력을 지닌 민간은행(영란은행)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가(정부)가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시장(민간)에 빚을 지는 국채시장의 탄생도 금융혁명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독점적 발권력을 지닌 민간은행으로 1694년 설립된 영란은행. 윌리엄 3세는 런던의 금융업자들 한테서 금 120만 파운드를 빌리는 대가로, 그들에게 은행(주식회사)을 설립할 권한을 주고 앞으로 는 이 은행이 인쇄한 종이, 즉 ‘은행권’을 국가화폐(법정화폐)로 쓰겠다는 칙령을 내렸다.


아일랜드라고 금융혁명의 도도한 바람이 비켜갈 리는 만무했다. 토지를 손에 쥐고 금융과 상업으로 부를 일군 소수의 앵글로-아이리시 자산계층을 중심으로 1716년부터 아일랜드 정부를 상대로 한 공식적인 ‘대출’이 시작되었다.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미래의 조세수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서 영구히 이자수입을 보장받는 것뿐 아니라 각종 독점적 특혜도 덤으로 따라붙었다. 브로브딩낙 왕이 궁금해했던, 한 나라의 채권자인 이들이 아일랜드의 실질적 지배자로 점차 탈바꿈해갔다. 소수 자산계층 테두리에 묶였던 스위프트는 이런 흐름의 적극적 옹호자였다.
  
중요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아일랜드의 조세정책에 자꾸 개입하려 드는 영국이 ‘훼방자’로 인식되면서, 이들한테서도 ‘아일랜드 정체성’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몸은 아일랜드에 있어도 머리는 영국에 있던 과거와 견주면 아주 놀라운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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