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무척이나 순진한 발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오늘 밤 여러분이 달라지기로 결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을 사랑하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닫고 말겠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말겠어. 오늘 밤부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겠어. 부정적인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입을 틀어막겠어.’
오늘 밤 강당을 빠져나가면서 이렇게 결심을 한다면 앞으로 적어도 3~4주 만에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고른 붓, 내가 고른 색깔을 가지고 내 손으로 직접 그린 낙원 속으로 뛰어들자.”
지옥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지옥을 그리십시오. 하지만 부모님이나 사회를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지옥을 만든 것은 그런 그림을 그린 사람의 책임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래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념하고 선택해야 할 삶은 현재입니다. 바로 지금의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재력을 계발하려면 먼저 ‘못된 나’를 내다 버려야 합니다. ‘자아에 반하는 쓰레기’를 말입니다. 이런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 마’라는 쓰레기, ‘난 못해’라는 쓰레기, ‘안 돼’라는 쓰레기, ‘불가능’이라는 쓰레기, ‘절망’이라는 쓰레기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바보들이나 쓰는 말이지 현명한 사람들이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세요. 절대라는 말을 결코 하지 마세요. 불가능하다고요? 누가 그러던가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인류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꿈들은 모두가 한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서서 가능하다는 걸 입증한 거였습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벌떡 일어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죽지 않아!’라고 말하고, 실제로 병을 이겨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새터데이 리뷰》의 편집장이었던 노먼 커즌스(Norman Cousins)는 웃음 치료 분야를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때 강직성 척수염이라는 병에 걸려 굳어가는 뼈와 근육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난 후에 통증이 줄어드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는 15분 동안 웃으면 2시간 동안 통증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적극적인 웃음 치료로 병을 치료하고 본격적으로 이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웃음의 치유력(Anatomy of an Illness)》를 통해 두 달 남짓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던 그가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새로 태어났었는지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삶을 향해 ‘좋다!’라고 말하십시오. 놀라움, 기쁨, 절망을 향해 ‘좋다!’라고 말하십시오. 고통을 향해, 이해하지 못할 일에 대해 ‘좋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라고, ‘가능하다’라고, ‘희망적’이라고, ‘하겠다’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불완전하게 살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안의 모든 걸 있는 그대로 표현하십시오. 여러분 안의 모든 걸 끌어안으십시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현하고 끌어안는 데 집착하십시오.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요.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창의력을 끊임없이 계발하십시오. 500살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면서 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좀 더 빠르고 획기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나’를 변화시켜 ‘우리’로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에는 저도 포함시켜 주십시오. 저는 ‘나’를 주장하는 세대에 신물이 났습니다.
여러분을 제 삶에 초대하려면 저를 조금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좋습니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으니까요. 똑같은 이치로 제가 여러분을 초대하면 여러분도 조금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기 자신을 양보하고 포기하면서 더 넉넉하고 큰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삶을 선택하려면 위험을 거듭해야 하고 사랑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합니까? 무엇 때문에 땀을 흘립니까? 무엇 때문에 고생합니까?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걸 놓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손실입니다. 하지만 모험과 상처와 고통을 감내하면 진정한 사랑이 뭔지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은 많은 걸 사랑하는 것이다.”
멋있지 않습니까? 삶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은 많은 걸 사랑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얼마나 삶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하루에 몇 번이나 ‘싫다’라는 말을 쓰는지 세어보면 됩니다.
“이건 싫어. 저리 치워. 보기 싫어. 난 저런 사람들 정말 싫어. 난 이런 거 정말 싫어.”
삶을 사랑하신다고요? 그럼 이렇게 묻겠습니다. ‘너무 좋아. 이거 너무 좋아. 나는 꽃이 너무 좋아! 나는 아이들이 너무 좋아’같은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십니까?
조앤 앳워터(Joan Atwater)의 《소박한 삶(The Simple Life)》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늘 강연을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삶의 모든 지혜를 짧고 멋있게 모아 놓은 이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짐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게 너무 무겁고 복잡한 일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단순한 해답이 없는 것이 오늘의 문제다. 복잡할수록 무기력하고 무능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점점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진정으로, 단순하게, 솔직하게, 곁가지 없이 명료하게 사느냐의 여부가 우리에게 달린 문제다. 삶을 온전하게 사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서 배우고 삶을 사는 건 그 사람이 할 나름이다.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배울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정의 내리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여러분의 삶이기 때문이죠. 각자가 정의 내릴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삶을 용감하게 선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