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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16. 2018

05. 커지고 싶다면, 나를 섬겨라.

<남자의 후반전>



물론 인간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는 ‘커지려고 하는 욕구’가 동력이 된다. 이 욕구가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나타나면 건강한 자기애가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병리적인 자기애가 된다. 아이들이 자랄 때 부모의 칭찬을 받으면 뿌듯해하며 주변에 자랑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나 잘했지? 그러니 너희들은 다 내 말을 들어야 해. 안 들으면 콱 때려준다!” 이러면 문제가 된다. 이것이 병리적인 자기애다. 병리적인 자기애에는 과시욕이 따라온다. 데이비드 마이어스라는 학자는 과시욕을 self-serving bias라고 했다. 끊임없이 “나만 섬겨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과시욕은 있다.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자기 안에 과시욕이 있음을 인정하고 조절한다. 그러나 병리적인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그런 조절 능력이 없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만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
  
조절 능력은 청소년기 때부터 키워야 된다. 그때 현실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하고 싶더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나이가 청소년기다. 아이들이 조절 능력을 키우려면 부모가 조절 능력이 있어야 한다. 어렸을 때 엄마·아빠로부터 “거짓말하면 안 된다, 친구와 싸우면 안 된다, 교통질서는 꼭 지켜야 된다.” 등등의 얘기를 들었다. 엄마·아빠도 말한 것처럼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청소년기에 보니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때 부모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아픔을 겪는다. 말하는 것과 다른 현실을 살고 있는 부모를 미워하며 받아들이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독립을 시작한다.
  
“왜 우리한테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면서 엄마·아빠는 안 해?” 아이들이 이렇게 얘기할 때 부모들이 인정해야 한다. “맞아. 너도 그렇게 해야 되지만, 나도 해야지.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얘기해야 아이들에게 조절 능력이 생긴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그건 너만 지키는 거야, 난 안 지켜도 돼!”, “나는 부모고 넌 자식인데 너랑 나랑 같아?”라고 한다.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얘기다. 아이들이 이런 것을 보고 자라면 하고 싶은 것을 참거나,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는 조절 능력이 키워지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교육의 문제가 사회 지도층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이런 식이면 병리적인 자기애가 조절되기 어렵다. 힘 있는 사람은 불법을 저질러도 된다는 힘의 논리가 우세할수록 병리적인 자기애도 강해진다. 너도나도 힘을 가지고 싶어 하고, 일단 힘을 가지면 ‘나를 섬기라’며 과시욕을 부리게 된다. 그것이 안 되면 ‘찌질이’가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중년기도 늦지 않다. 이때라도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면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을 괴롭히며 불행한 인생을 살아갈 확률이 너무 높다. 노후 대비는 돈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마음에서부터 해야 한다. 마음으로 노후 대비가 된 사람들은 적은 돈을 가지고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도 불행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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