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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약하고 모자라고 싫은 부분까지 모두 나 자신

<어쨌거나 괜찮아>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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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자신의 보고 싶은 점, 마음에 드는 점뿐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은 점, 마음에 들지 않는 점까지도 포함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라도 눈속임 없이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 싶지 않은 자신도 포함해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나르시시스트와는 다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약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할 수 없죠. 따라서 쓴소리를 받아들이거나 실패를 통해 배울 수도 없습니다.

‘내게는 모자란 부분이 있다, 약점이 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모자란 부분, 약점, 부족한 부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조금씩 극복하기 위해 배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애자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는 자기애가 강해 ‘훌륭한’ 내가 되고 싶다는 자기 찬미의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면 실망한 나머지 ‘모자란 녀석, 한심한 놈’인 나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혐오하며 거부하게 됩니다. 결국, ‘모자란 나’, ‘훌륭하지 않은 자신’을 ‘이 또한 내 모습’이라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소비자본주의가 가져온 것

오늘날 많은 사람은 호화로운 저택과 소비재를 론(loan)이나 신용카드로 빚을 내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실제 자신이 가진 능력을 넘어서는 자기상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어때, 이만하면 훌륭하지’하며 들뜬 기분을 맛보고, ‘나도 이 정도면 대단한 사람’이라며 내가 소유한 것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런 자신에 취해 스스로를 찬미합니다. 빚으로 쌓아 올린 ‘환상’의 자기상입니다.

지금의 소비자본주의는 자기애의 만족, 나르시시즘의 욕망 충족을 돕는 것들로 이루어지고 유지됩니다. 우리가 사는 상품이나 서비스 대다수는 자기애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들이고요. 사람들은 아무 노력 없이도 손쉽게 ‘특별한 자신’을 살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과시하고 칭송받을 만한, 그런 특별한 자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 위에서 번영을 이룬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입니다.

소비자본주의의 문화에서 ‘고객은 왕’입니다. 이는 손님을 ‘기분 좋게 해 준다’는 발상을 통해 발전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를 잔뜩 만들어 내는 문화지요. 그것은 인생을 보다 충실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자기 찬미’를 장려합니다. 진정한 자신보다 칭찬하고 싶은 자신이라면 기분도 좋고 매일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거죠. 그런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착각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훌륭함을 깨닫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때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란 조건을 전제로 한 사랑이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모자란 부분, 약한 부분, 싫은 부분, 그 밖에 여러 가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훌륭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훌륭하지’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이런 사랑이 자기애입니다. 나에게 훌륭한 점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는 자기애인 것입니다. 이는 거울을 훔쳐보는 새끼 고양이가 거기 비치는 모습을 커다란 사자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크고 강하며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으면 메모해 놓자, 거울을 보며 ‘당신 멋져!’라고 말하자, 이런 이야기들이 그 예입니다.

이런 문화는 자기 찬미, 즉, ‘자만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찬미하는 일과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혼동합니다. 제가 말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자신이라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있어서 ‘친구’는 예컨대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르며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분을 위해 타인을 조작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며,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기피하지요.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동시에 타자를 존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존심이 자신을 진정 존중하는 것이라면, 자기 찬미나 자아도취와는 조금도 비슷할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 생명체로서 살아 있는 것, 그 자체를 소중히 존중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그 자체,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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