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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16. 2018

03. 찰나의 온기를 갈구하는 성냥팔이 소녀들

<어쨌거나 괜찮아>



being과 doing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자기긍정감은 자신의 존재가 무조건 수용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관계를 통해 확보됩니다. 그 안심감이 ‘인생의 구명튜브’라고 저는 말한 바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being)’가 무조건 수용되고 사랑받은 경험이 없으면, 자신의 자리에서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는 (doing)’ 것으로 인정받고,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조건 없이 자신의 존재가 수용되고, 사랑받았던 사람은 무조건 ‘그곳에 있어도 좋다’고 마음을 놓습니다. 그러나 그런 안심이 결여된 사람은 마음속 깊이 그곳에 있을 가치가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고,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한 일을 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부담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그곳에 있을 자격을 얻을 만한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아주 잠깐의 안심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설 자리를 얻어 내는 일도 아마도 같은 맥락에 있을 것으로 이해됩니다.
  

열심히 하는’ 것으로 설 자리를 확보한다.
  
‘무조건 안심’해 본 사람일지라도 ‘나는 별로 쓸모가 없다’라든가 ‘성적이 나쁘다’며 부끄러움이나 부담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존재의 가치 자체가 위협받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정도의 공포와 패닉에 빠질 일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자기긍정감(안심감)이 결여된 사람의 경우 경쟁 사회에서 유난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늘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주변 사람들보다 자신이 뛰어나거나, 최소한 남들 정도는 뭔가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안심감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것 아닐까 하며 자신감을 잃으면, 이내 나는 여기 있을 자격이 없지 않나 하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제가 카운슬러로서 만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무척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날 우리 사회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안데르센 동화의 주인공 ‘성냥팔이 소녀’에 비유했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눈 내리는 추운 밤 몸을 녹일 방법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팔던 성냥을 켜 작은 불을 피워 빛과 온기를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성냥불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피어오를 뿐입니다. 그렇게 성냥불이 꺼지면, 다음 성냥을 켜 불을 쬐어야만 합니다.
  
인생을 ‘경쟁의 레이스’로 보는 경쟁 사회의 삶 속에서 언제나 열심히 달리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 제 눈에는 성냥팔이 소녀와 겹쳐 보입니다. 마지막 성냥불이 꺼지면 더 이상 불을 쬐지 못하게 된 소녀는 추위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지요.
  
이 ‘경쟁의 레이스’ 같은 세상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은, 계속 성냥불을 켜서(계속 인정을 갈구함으로써) 겨우 작은 빛과 조금의 온기를 얻는 성냥팔이 소녀입니다.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찰나의 안심감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힘이 다하면 성냥불이 꺼지듯 다시 추위와 외로움이 찾아옵니다. 생명의 위협과 맞닥뜨립니다. 그야말로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와 칠흑 같은 어둠에 홀로 남겨져 적막감과 공포감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상상조차 못 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밝고 따뜻한 화롯가에서 몸을 녹일 수 있는 ‘홈(home)’이 부재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런 ‘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성냥불을 켜 찰나의 빛과 온기를 얻지 않아도 어둠을 몰아내는 밝은 불빛 속에서 몸을 녹이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자기긍정감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결코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상냥한 사회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사회의 수요에 따른 인력으로 키우고 청년들을 쓰고 버립니다. 진정 자립적인 어른으로 길러내려는 사랑이 결여된 사회처럼 보입니다.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사회는 성숙한 어른들의 사회라 할 수 없습니다. 아귀들의 사회라고 하는 게 적절하겠죠.
  
이런 사회다 보니 어른들 또한 완전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래서 이 험한 사회를 살 수 있겠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라며 집에서조차 혹독함을 요구하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는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세상에 아이를 내놓으면서 집 안에서조차 얼음으로 가득 찬 욕조로 아이들을 밀어 넣으면 어떻게 합니까. 추위를 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찬바람이 몰아치는 세상으로 쫓아내면 아이는 결국 폐렴에 걸리고 말 겁니다. 심하면 추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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