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비련의 여주인공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by 더굿북

1.jpg?type=w1200 천경자와 어머니


천경자는 인생의 시련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를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생각했다. 이러한 자아상은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생전에 그녀의 어머니는 천경자가 남으로부터 피해나 수모를 당할 때마다 “니나 나나 전생에 황후였는가 보다. 그런 사람이 다시 태어나면 안 좋단다”라는 말로 위로해주곤 했다. 이 말은 삶의 고난이 심해지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천경자는 힘들 때마다 자신이 전생에 어느 왕조의 황후였다는 상상을 하며, 현실의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세상에 저항하곤 했다.

인생의 주인공들은 비극적인 운명과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꿈을 향해 매진한다. 그들의 삶이 비록 미숙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꿈을 향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응원하게 된다. 천경자는 영원히 미완성이 될지도 모를 꿈을 향해 쓰라린 고배와 불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영화 속의 여주인공들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슬픔에 공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천경자의 <청춘의 문>은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완벽한 미모에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성들의 우상이 되었던 그레타 가르보는 스크린의 여신이었지만, 뭇 남성들의 청혼을 거절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나중에 여배우 미미 폴락에게 쓴 편지가 공개되면서 그들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폴락은 이혼을 당했다. 이 사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자 가르보는 폴락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인기절정의 시기에 은퇴를 결정했다. 그녀는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평생을 고독하게 산 비운의 여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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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jpg?type=w1200 그레타 가르보와 천경자



<청춘의 문>에서 그레타 가르보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창백한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우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다리에는 화려한 꽃들로 치장되어 있지만 상념에 젖은 표정과 가늘게 늘어진 손가락은 왠지 멜랑콜리한 슬픔이 느껴진다. 목에 두른 보라색 색종이는 현실과 이상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실제보다 다소 길어진 얼굴과 관능미가 제거된 꼿꼿한 몸, 그리고 가느다란 손은 천경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이다. 그녀는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슬픔과 고독을 읽어내고 거기에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다.

4.jpg?type=w1200 <청춘의 문>, 1968, 종이에 채색, 145x89cm


또 다른 작품 <팬지>는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렸던 마릴린 먼로를 모델로 삼았다. 그림 속 마릴린 먼로는 유리병 안에서 팬지꽃을 화관으로 쓰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가장 로맨틱한 꽃으로 알려진 팬지는 처음에 흰색이었다. 그런데 사랑의 신 주피터가 자신이 연모하는 시녀에게 화살을 쏜다는 것이 실수로 길가에 있는 오랑캐꽃을 쏘아 3가지 색의 제비꽃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가 제비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세 번 키스한 것이 3색의 팬지꽃으로 피어났다는 설도 있다.

5.jpg?type=w1200 <팬지>, 1973, 종이에 채색, 62x48cm



삼색제비꽃이라고도 불리는 팬지는 그림에서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을 벌이고 있고, 화병에는 마릴린 먼로가 섹시한 입술로 활짝 웃고 있다. 하지만 게슴츠레하게 뜬 눈에는 우수에 찬 슬픔과 고독이 가득하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그녀의 삶에 말 못할 고뇌와 슬픔이 왜 없었겠는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정신장애가 있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입양되었고, 양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보육원과 고아원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지만 4년 만에 헤어지고, 유명한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두 번째 결혼도 남편의 상습적인 폭행으로 끝이 났다. 어찌나 맞았는지 얼굴에 있는 멍을 감추기 위해 늘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는 먼로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스타의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이후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했지만 두 번의 유산과 심한 우울증에 괴로워하다 이혼해야 했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던 먼로는 몇 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1962년 자신의 침대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이자 화려한 대중스타였지만, 동시에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다.

천경자의 작품에서 팬지꽃과 마릴린 먼로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의 운명이다. 화려하게 핀 꽃은 아름답지만 곧 져야 할 운명이기에 슬프고, 마릴린 먼로의 아름다움은 내면에 치명적인 상처와 고독이 있기에 슬픈 것이다. 천경자는 화려함 속에 내재된 존재의 슬픔을 간파했고, 슬픔이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운명이라면 슬픔과 한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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