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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29. 2018

01.깨뜨릴 저금통 하나만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당신이 만나는 기적>



배가 고프다고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될까? 
목이 마르다고 아무 물이나 마셔도 될까?
돈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자칫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도 있다.

1996년 12월 27일, 마블(Marvel Comics)이 파산했다. 미국의 만화 역사를 대표하고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5000개 가까이 보유한 굴지의 만화 출판사가 어쩌다 이런 상황을 맞게 되었을까?

마블의 시초는 1939년에 뉴욕에서 문을 연 타임리 코믹스(Timely Comics)였다. 그래서인지 마블의 슈퍼히어로인 스파이더맨과 엑스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등은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미국 어린이들은 모두 마블의 슈퍼히어로들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던 마블은 줄곧 미국 만화업계의 우두머리였으며 여기에 대항할 수 있는 경쟁자는 DC(DC Comics) 정도밖에 없었다.

1986년은 미국 만화 역사의 분수령이 된 해다. 이해에 DC에서 내놓은 《배트맨 다크 나이트(Batman Dark Knight)》가 큰 인기를 끌면서 만화의 독자층이 어린이에서 청소년, 성인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마블은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는커녕 그 낌새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마블의 슈퍼히어로는 어느새 새로울 것 없는 식상한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오락거리가 등장하자 만화를 보는 어린이가 크게 줄어들었고, 마블의 만화는 매년 5000권에서 1만 권씩 판매량이 감소해 갔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이 어두운 밤일 때 지구의 반대편은 환한 낮인 것처럼 세상 만물에는 어둠과 빛이 동시에 존재하는 법이다. 마블이 장악한 시장은 날로 줄었지만 ‘만화 수집 시장’에서 마블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 보존 상태만 좋다면 옛날에 출판된 만화들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예를 들어 슈퍼맨이 처음 등장한 《액션 코믹스(Action Comics)》 1호의 경우 원래 가격이 0.4달러였지만 최근에 경매에 나와 100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수많은 초판본을 보유한 마블은 월 가의 투자자들에게 황금알을 품은 거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모두 마블의 미래보다 마블이 과거에 누적한 자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가장 먼저 마블에 손을 뻗은 이는 로널드 페럴만(Ronald Perelman)이었다. 8000만 달러에 마블을 인수한 그는 이미 레블론(Revlon), 허머(Hummer) 등 여러 기업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업 사냥꾼인 페럴만은 대상 기업을 인수하고 상장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페럴만은 만화에 전혀 흥미가 없어서 마블에 가면 슈퍼맨과 배트맨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두 히어로가 경쟁사인 DC소속인지도 몰랐다. 그의 관심사는 그저 돈벌이뿐이었다. 그는 마블을 방문하지도 않았으며, 만화가나 편집자와도 전혀 접촉이 없었다. 대신 매년 ‘아버지의 날’이 되면 딸을 데리고 와서 슈퍼히어로들을 가리키며 “이게 전부 아빠 거야!”라고 말했다.

페럴만은 1991년에 마블을 상장시켰다. 초기 투자 열풍으로 주가가 상승했지만 마블에는 은행 대출 5억 달러가 남아 있었다. 주가를 유지하고 매달 은행 이자를 지불하려면 매출을 크게 올려야 했다. 페럴만은 0.4달러이던 만화책 가격을 1달러로 인상하고 출판 부수도 대폭적으로 늘렸다. 그는 만화의 내용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재무 보고서만 보기 좋으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가격은 올랐는데 이전보다 훨씬 조악한 그림과 전혀 설득력이 없는 스토리를 내놓았으니 누가 사서 보겠는가?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마블의 재무 상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정도에 이르렀다. 은행 채권단이 구조조정과 파산 선언을 요구했지만 페럴만은 천하태평이었다. 마블은 그가 소유한 여러 기업 중 하나일 뿐이었고, 상장하면서 이미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은행 채권단과 손을 잡기로 했다. 마블을 파산시켜 우선 채무를 갚고 나중에 좋은 조건으로 대출받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96년 12월 27일, 페럴만은 마블의 파산을 선언했다.

이때 월 가의 또 다른 기업 사냥꾼 칼 C. 아이칸(Carl C. Icahn)이 나타났다. 그의 방식은 주로 이러했다. 우선 대상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해서 지배권을 장악한 후 기업을 매각하겠다고 위협한다. 창업주 혹은 기존 주주들이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일군 기업을 유지하려면 개인 재산이나 은행 대출로 아이칸의 주식을 회수하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아이칸은 보유한 주식에 많은 프리미엄을 붙여 팔아 큰 이익을 얻는다. 쉽게 말해 일단 기업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해놓고 ‘큰돈을 챙기는’ 방식이다. 아이칸은 파산을 선언한 페럴만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빠른 속도로 마블의 주식 3분의 1을 사들였다. 결국 1997년 6월 21일, 법원은 마블에 대한 아이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이 전투에 두 명의 ‘젊은 카우보이’까지 뛰어들었다. 작은 완구 회사 토이비즈(Toy Biz)의 사장인 아이작 아이크 펄머터(Isaac Ike Perlmutter)와 총감독 아비 아라드(Avi Arad)였다. 어느 날 아라드는 토이비즈가 마블의 슈퍼히어로 관련 상품을 제작하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만약 마블이 무너지면 토이비즈가 쥐고 있던 황금알이 썩은 계란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와 펄머터는 페럴만과 협상 끝에 토이비즈의 주식 25%를 넘겨주고 향후 마블의 슈퍼히어로 관련 상품을 무상으로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권한을 완전히 확보했다. 이 협상의 더 큰 목적은 두 기업을 하나로 묶어서 함께 아이칸에게 대항하는 것이었다.

아이칸도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은행 채권단과 만나서 마블이 갚아야 할 돈이 6억 달러이니 3억 7500만 달러만 주면 마블을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도 은행 채권단 측은 손실이 없었다. 마블을 매각하면 오히려 돈을 버는 셈이었다. 아이칸은 은행에게 인질을 넘기고 자기는 돈을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장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양측이 한창 진지하게 협상을 벌이는 중에 누군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라드였다. 그는 마치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카우보이 존 웨인(John Wayne)처럼 몸을 크게 흔들며 건들건들 걸어 들어오더니 은행 채권단을 향해 외쳤다. “제정신이요? 스파이더맨만 해도 시장가치가 자그마치 10억 달러란 말입니다. 3억 7500만 달러가 뭡니까?” 은행 채권단은 이 느닷없는 상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블을 팔기보다는 잘 유지해서 수익을 받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은행 채권단은 즉각 아라드와 펄머터를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1998년 7월 31일, 법원도 토이비즈가 마블을 합병할 수 있도록 손을 들어 주었다. 아이칸은 약간의 배상금만 가지고 마블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블에서 얻은 이익은 겨우 350만 달러에 불과했다. 맛있는 떡을 배불리 먹으려고 왔는데 겨우 떡고물만 조금 집어 먹은 셈이었다.

아라드는 마블을 완벽히 장악한 후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전략을 발표했다. 바로 마블의 만화를 영화라는 매체로 보여 주기로 한 것이다. “세상을 호령하려면 할리우드로 가야 합니다!” 그는 각각의 슈퍼히어로 스토리를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했다. 만화는 이야기가 연결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에서 이해가 안 되면 5년 전의 이야기까지 다시 뒤적거리며 찾아봐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한 편이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런 방식은 시장의 수요에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아라드는 영화 제작에 큰돈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 마블의 팬들이 보고 싶은 것은 슈퍼히어로이지 스타가 아니기 때문에 유명 배우를 캐스팅할 필요도 없었다. 〈엑스맨〉에서 울버린을 연기한 휴 잭맨(Hugh Jackman)도 그때는 대단한 스타가 아니었다. 아라드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보다는 기존의 마블 팬들에게 집중해서 점차 확대해 나가는 방식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아껴도 당시 상황에서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영화 제작사에 제작 판권을 넘기는. 대신 영화가 성공하면 따라오는 만화책 및 관련 상품 판매에서 수익을 기대했다.

〈엑스맨〉과 〈판타스틱 4〉는 20세기 폭스, 〈헐크〉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스파이더맨〉은 소니픽처스……, 이런 식으로 총 다섯 곳의 제작사에 슈퍼히어로 영화 시나리오의 판권이 넘어갔다. 제작사들은 총 15편의 영화를 나누어 제작했다. 이 중 〈스파이더맨〉 1편은 8억 2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할리우드에 슈퍼히어로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엄청난 수익은 모두 영화 제작사의 몫이었고 마블이 받은 돈은 겨우 7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아라드는 월 가로 달려가 금융투자회사 메릴린치(Merrill Lynch)로부터 총 5억 2500만 달러를 투자받아 직접 10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제작사로 변신한 마블의 처녀작 〈엘렉트라(Elektra)〉의 흥행 성적은 정말이지 처참할 지경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인기 있는 슈퍼히어로의 영화 제작 판권은 모두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마블의 손에는 만화책으로도 판매량이 그저 그랬던 캐릭터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블은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찾아 관객을 사로잡을 만한 색다른 스토리를 창조하기로 했다.

얼마 후, 총 2만 권도 채 팔리지 않은 만화 〈아이언맨(Iron Man)〉의 영화 제작이 결정됐다.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아이언맨은 약물 중독으로 문제를 일으킨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가 맡아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절치부심하여 만들어 낸 〈아이언맨〉은 다행히도 총 5억 8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2008년 할리우드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이어서 제작된 2편과 3편까지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며 가장 매력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로 자리 잡았다. 이로써 마블은 비로소 다시 한 번 비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마블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토록 열심이었던 아라드가 갑자기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정해진 공식대로 사는 인생에 환멸을 느꼈다며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했다. 이제 마블은 펄머터 혼자 이끌게 되었다. 그는 아라드와 달리 오로지 사업 능력만 뛰어난 경영 엘리트였다. 그동안 펄머터는 아라드의 능력을 존중하며 창의적인 일을 모두 그에게 일임했다. 자신이 할 일은 회사를 탄탄하게 경영해서 아라드가 창의성을 한껏 발휘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용과 수익을 따지는 데만 능한 그가 유일한 경영자가 되면서 마블의 사내 분위기는 엄격을 넘어 ‘각박’에 가까워졌다. 펄머터는 사무실의 무료 커피를 없애고, 택배 서비스를 취소했으며, 심지어 단면 인쇄까지 금지시켰다. 한 번은 편집실 바닥에 떨어진 클립 하나를 줍더니 일하는 편집자에게 “제발 내 돈을 낭비하지 말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만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슈퍼히어로가 몸에 꼭 맞는 내복을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줄만 아는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리더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마블이 다시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또 적중했다. 2009년 12월 31일, 디즈니가 42억 달러에 마블을 인수한 것이다. 무정한 펄머터는 회사를 매각해 엄청난 금전적 수익을 얻었다!

큰돈을 들여 마블을 사들인 디즈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30년 후에 원금을 회수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지금 추세로는 약 7~8년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파란만장한 마블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마블이 수없이 많은 굴곡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콘텐츠’였다. 마블은 1939년에 설립된 후로 끊임없이 자기만의 콘텐츠를 구축하고 발전시켜 왔기에 연이은 인수합병과 복잡한 경영구조 속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아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모두 생각에 달려 있다. 자신의 생각 없이 단순히 명령만 따르는 병사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마블의 영화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도 그 뿌리는 만화다. 언제나 만화가 먼저다. 만화가 있었기에 영화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블의 성공은 무슨 경영 이론이나 회계 분석 자료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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