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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03. 2018

04. 거울은 고쳐야 할 점을 찾는 데 쓰는 물건이다.

<당신이 만나는 기적>



진실이 엄폐되는 것은 
그 사실이 너무 깊이 묻혀 있기 때문일까?
우리의 두 눈을 가리는 것은 
거짓된 이미지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고집일까?

진실이 가려지는 이유는 너무 깊이 묻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두 눈을 가린 채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만약 참혹한 진상이라면 눈을 가릴 검은 천조차 필요하지 않다. 참혹할수록 사람들은 두 눈을 꼭 감고 못 본 척할 것이기 때문이다.


1963년 12월 20일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독일인은 스스로 나치의 범죄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고 심판했다. 그들은 죄를 마주하고 반성하며 독일 청년들의 나치에 대한 그릇된 의식을 바꾸고 역사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운영하는 가장 큰 ‘살육장’이었다. 매일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유대인이 이곳에서 ‘마지막 처리’를 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에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연합국의 재판관은 아우슈비츠 나치당 친위대 군관 세 명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1947년,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에서 다시 한 번 아우슈비츠 재판이 열렸다. 수용소의 책임 군관, 방위병, 트럭 운전기사 등의 피고 마흔 명 중 서른아홉 명이 유죄로, 그중 스물한 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수용소의 의사 한스 뮌히(Hans Münch)였다. 수용소에서 의사들은 유대인이 기차에서 내리면 몸이 약한 사람들을 골라내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바로 독가스실로 끌려가고 건강한 사람은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하지만 뮌히는 ‘선별’을 거부했으며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 한 명에게 권총을 쥐여 주며 탈출을 돕기도 했다. 그는 ‘양심적인 의사’로 인정받아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국제정세가 변화하고 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나치 당원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보유했으면서도 소련과 대치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나치 전범을 심판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죄가 있는 독일인은 자신의 범죄행위를 덮기에 급급했고, 죄가 없는 독일인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들춰서 전후에 태어난 세대가 ‘대학살’의 진상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나치를 심판하는 일은 자꾸만 뒤로 미뤄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는 반드시 빛이 있는 법,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프리츠 바우어(Fritz Bauer)는 행동했다. 유대인인 그는 전쟁 전에 독일에서 추방당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와 검찰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나치의 대학살을 끝까지 추적하고 조사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그를 저지하려는 힘이 너무 거셌다. 좋지도 않은 일을 왜 자꾸 들추려고 하느냐는 눈초리가 따가웠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우어는 ‘유대인 대학살’의 실무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산다는 첩보를 입수했을 때 잠시도 주저하거나 지체하지 않았다. 바우어는 즉각 이스라엘에 관련 정보를 전달하고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가 아이히만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재판을 받도록 했다. 독일에서는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막힌 높은 담장 아래에서 새로운 열쇠가 발견되었다. 익명의 제보자가 서독 사법기관과 국제 아우슈비츠 위원회에 나치 군관 빌헬름 보거(Wilhelm Boger)가 모처에 숨어 살고 있다고 고발한 것이다. 보거는 ‘보거 그네’라는 악명 높은 고문 기구까지 발명한 나치의 고문 기술자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고발 내용은 매우 믿을 만했지만 서독 사법기관은 애써 무시하며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국제 아우슈비츠 위원회의 압박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1958년 10월에 보거를 체포했다.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보거가 체포된 후 아우슈비츠 학살에 참여한 다른 범죄자들에 대한 추적도 탄력을 받았다. 바우어는 이 열쇠를 손에 들고 아우슈비츠로 통하는 어두운 동굴의 문을 열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수십만 개에 달하는 파일을 샅샅이 조사해서 총 4000여 개의 자료를 새롭게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총 19개국에서 359명의 증인을 찾아냈다. 이중 221명이 아우슈비츠의 행운의 생존자였다. 이후 바우어는 아우슈비츠의 중하급 군관 스물두 명을 고발했다.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고인들은 모두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죄를 면하려 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거만한 나치 독일군의 태도로 재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행동했다. 증거가 하나하나 제시되고,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증인들은 피고들이 모두 대학살의 조력자가 아닌 주동자였다고 증언했다. 법정은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한 것 역시 똑같은 범죄’라고 못 박았다. 재판 결과, 고발된 스물두 명 중 열아홉 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나머지 세 명은 무죄 석방되었다. 독일은 1949년에 사형을 폐지했기 때문에 열아홉 명 중 여섯 명은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각각 33개월에서 14년형을 받았다. 다만 이중 두 명은 중병에 걸려 있어서 구속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이 있기 전에 독일인들은 나치의 죄악이 모두 악마 같은 우두머리들, 예를 들어 히틀러나 힘러와 같은 자들이 저지른 일이며 그 밑의 군인들은 모두 커다란 기계의 ‘나사못’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심적인 의사’ 뮌히는 이런 생각을 뒤집어엎는 반증이었다. 나치당에 들어가서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스로 히틀러의 인종청소 정책에 동조했으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이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재판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나치 대학살이라는 비극이 소수의 악마가 일으킨 일이 아니라 거대한 공모자가 있었음을 교육하려는 의도였다!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독일인은 없었다.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세대를 거치며 깊이 반성해야만 비로소 역사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 후 독일은 지속적으로 나치를 추적, 조사하고 단 하나라도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즉각 재판을 열었다. 또한 1979년에는 법을 수정하여 ‘특별한 살인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를 폐지’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특별한 살인’에는 인종차별 살인, 연쇄 살인, 성적 취향에 대한 혐오 살인 등이 포함된다.

2015년,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흐른 이해에 아우슈비츠의 회계 직원이었던 오스카 그뢰닝(Oskar Gröning)이 재판을 받았다. 이미 아흔세 살의 고령인 그뢰닝의 재판을 두고 언론은 ‘최후의 나치 심판’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2016년에 아우슈비츠에서 의무원으로 일했던 휴버트 Z.(Hubert Z.)의 재판이 열렸다.

이미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을 재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법적인 문제를 떠나 정의와 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야만 할 가치 있는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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