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Apr 05. 2018

04. 과거의 상처가 만성적인 화가 된다.

<나는 오늘부터 화를 끊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다.

우리는 “아픈 곳을 찌르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모두가 아픈 곳을 가지고 있다. 이 표현에는 자동적인 반응이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다. 찌르면 아프고, 아픔에는 정서적 반응이 자동으로 연결된다.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선을 넘지 마라는 자신의 요구가 침해받는 순간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픈 곳을 찔리면 마치 로봇처럼 미리 정해진 기계적 반응이 나온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익숙한 사람은 ‘매크로’(일정한 결과를 얻기 위해 여러 개의 명령어를 묶어서 하나의 키 입력 동작으로 만든 것)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의 아픈 곳들은 유년시절을 포함해서 각기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그리고 다양한 환경에서 생겨났지만 언제나 화를 유발하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거의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픈 곳을 찌르다’라는 개념에서 찌르는 사람은 예정돼 있다. 나를 잘 아는 누군가, 아니면 민감한 곳을 직감으로 알아낼 정도로 교활한 어떤 이들이 나의 분노나 불안을 끌어낼 행동이나 발언으로 나를 조종하려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의 공격에 허약한 상태가 된다. 내 삶의 행복을 좌지우지할 힘을 타인의 손에 쥐어준 꼴이다.
  
그런 상황에 대해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아픈 곳’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우리가 그런 곳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군가는 찌른다”라고 초드론은 말한다. “특히 그곳이 크고 빨갛게 번쩍거린다면…… 비록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도 상처 자체가 민감하기 때문에 그들의 작은 행위에도 아픔을 느낀다.” 
  

아픈 곳이 없는 삶

비록 어떤 일들에는, 이를테면 거짓말이나 속임수, 배신과 같은 일들에는 당연히 기분이 상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화는 부적절하고 비이성적인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우리의 편견이나 과거 경험, 또는 불교에서 말하는 ‘애집(愛執)’에서 기인한다. 
우리 삶에서 이러한 불필요한 화의 원인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의 아픈 곳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아파하는 범위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이슈를 포함한다.
  
명예/독립성/인정욕구/질투/자존심/존경
  
매사에 유난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감정을 위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아픈 곳과 그 뒤에 숨어 있는 요구를 찾아내면 치유할 수 있다. 잠깐 멈춰서 자동적으로 화가 올라오는 삶의 순간을 생각해보자.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할 때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라거나 ‘~할 때면 나는 정말 짜증이 나.’ 몇 가지 가능한 경우를 살펴보자.
  
· 나는 비판받는 것이 싫어.(인정욕구)
· 누군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싫어.(자존심)
· 나는 누가 내게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싫어.(독립성)
· 나는 누군가 내게 대거리를 하거나 논쟁을 하는 것이 싫어.(존경)
· 나는 친구가 나를 믿지 않을 때가 싫어.(명예)
· 여자친구가 다른 녀석들과 친하게 지내면 미친 듯이 화가 나.(질투)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어서 마땅히 항의할 수 있는 사항과 특별히 민감해서 나의 자동적 반응을 유발하는 ‘아픈 곳’을 구별하라. 
  

쓸데없이 아픈 곳도 있다.

우리가 ‘아픈 곳’에 붙여준 이름들은 때때로 그 원래 의미를 왜곡한다. 명예욕이나 비난을 피하고 싶은 욕구는 긍정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람직한 인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용도로 쓰여야 하는 ‘명예’라는 말은 종종 잘못 사용되어 아예 그 순수한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거의 변함없이 누군가 본인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판단하면 파괴적인 행동이 뒤따른다. 예를 들면, ‘명예살인’은 아직도 몇몇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데 이는 정직이나 진실과 같은 명예의 내용이 되는 덕목과는 전혀 상관없이 남성의 우월적, 지배적 힘을 유지하려는 수단으로서 작용할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강간을 당한 여자가 오히려 마을에서 추방되거나 가족들로부터 본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돌을 맞는다.
  
‘자존심’이라는 아픈 곳은 타인의 의견에 지나치게 의존적일 때 찔리게 된다. 타인의 의견은 본인의 고유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처는 순간순간 아니면 매일매일 요동치는 외부세계의 의견을 본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도구로 삼는 것은 바보라고 이야기한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노벨상, 다음 날은 똥덩어리!”
  
‘소유욕’은 자존심이나 명예욕과 달리 어떤 정의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질투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와는 상관이 없다. 그저 본인의 감정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다. 당연히 이로 인해 화를 낸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 못된다.
  

화와 증오

사람들이 화를 다루는 방법 중 하나는 화의 원인에 차단막을 두르고 접근금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혐오가 굳어지면 증오가 된다. 증오는 굳어진 화다. 우리는 특정 그룹의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선언하고 거리를 두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접근금지’다. 이런 식으로 특정 사람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생겨난다. 비만한 사람, 유대인, 흑인, 동성애자가 그 예다.
  
증오는 그 영향이 치명적이다. 증오를 품고 다니면 피해가 발생한다. 우리는 정치판에서 증오와 화가 분출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한편의 증오는 다른 편의 증오에 기름을 붓는다.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신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이유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누군가가 나를 공격한다는 생각은 단순히 독심술(讀心術)로 외부세계에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투영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열렬한 페미니스트는 남자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거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뒤로 물러나며 양보를 할 때 무례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옆으로 비켜서며 노인에게 먼저 타라고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노인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단지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저 여자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싫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05. 배워서 남 줘라.(마지막 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