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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11. 2018

01. 어쩌다 보니 경단녀

<엄마 말고 나로 살기>



언니요즘 저는 섬이에요.”
  
밖은 무던히도 환하던 5월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아이를 낳은 후 어쩔 수 없이 일을 쉬게 되면서 독박육아에 지친 나머지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밖은 화창하고 따뜻하기 그지없는데, 그녀의 마음은 시베리아 한복판에 들어서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메시지였다.

매일을 말 못 하는 아이와 단둘이서만 지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엄마는 섬이 될 이유가 충분하다. 그 섬에는 하루 종일 바깥에 있다가 밤중에나 집에 들어와서는 자기도 힘들다며 고생 많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기적인 남편과 제 자식만 챙기기 바쁜 눈치 없는 시어머니만 드나들 뿐이다. 그렇게라도 드나들면 다행이지만 간혹 남편이 출장이라도 가는 날에는 그야말로 무인도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녀처럼 나도 첫아이를 키울 때는 섬이 됐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문득, 내가 집에 틀어박혀서 아기 똥 기저귀나 갈자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가 하는 자괴감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기가 깨기 전에 빨리 밥을 먹어 치우느라 앉지도 못하고 서서 미역국을 들이마시는 것은 보통의 삶이 됐고, 가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준 것 같은데도 울고불고하는 아기를 볼 때면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랑은 종국에는 사랑하기 힘들어지는 대상이 된다. 나에게 온몸과 온 생명을 의지한 누군가의 존재는 몹시도 부담스럽다. 나의 하루는 모든 수고를 털어 낼 수 있는 잠자리에 들면서 조차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내가 잠을 잔 것인지 어땠는지도 모를 정도의 밤을 보내고선 있는 힘을 다해 남편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날들이 많았다. 
  
여기에 더해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나에게 ‘경력단절여성’이라는 칭호까지 붙여 주었다. 언젠가부터 이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말이 생겨나더니 절대 해당 사항이 없을 줄 알았던 나 역시 거기에 포함되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해당 여성을 제4의 성으로 분류라도 해 놓은 것 같았다. 결혼과 임신, 육아라는 일련의 과정을 겪은 여성에게 이제 다시는 경력을 이어 갈 수 없는 패배자라는 낙인이자 꼬리표를 다는 것만 같았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단절만을 겪어야 하는 죽은 사람이라는 표시 같았다. 나는 도대체 ‘단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단절을 ‘유대나 연관 관계를 끊음’으로 정의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번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지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끊어진 줄이라면 어떻게든 묶어 보든가 풀로 붙여 보기라도 할 텐데 어쩌다 우리는 다시 이어 붙일 수도 없는 단절된 여성으로 규정된 것일까? 정부에서 말하는 단절은 쉼표가 아닌 마침표 같다. 그래서 나는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말 대신에 ‘경력휴지기여성’ 내지 ‘경력휴식기여성’이라는 말 정도로 그 지칭어를 바꾸는 것이 어떨까 한다. 우리는 언제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과 여건이 받쳐 주지 않아 잠시 쉬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우리 몸의 3대 영양소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고 영혼의 3대 영양소는 자유, 유능, 관계라고 한다. 아기를 낳은 엄마는 가장 잘 먹어야 하는 순간조차 누군가가 음식을 해 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영양소를 골고루 챙기기 힘들어 몸의 3대 영양소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거기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로만 가득 차 있으니 자유가 상실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경력이 단절된 상태에서 나의 유능감이라고는 펼칠 수 있는 장도 마련되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계는커녕 기존의 관계조차 흔들리니 영혼의 3대 영양소는 그야말로 기아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주어진 결핍을 채움으로 바꾸기 위한 돌파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나는 단절이 아니라 휴식에서 찾고 싶다. 나는 멈춘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른 이가 나를 어떻게 규정하였든, 적어도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해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와 염원이라도 남아 있을 테다. 어쩌다 보니 경단녀가 되었다면, 어쩌다 보니 다시 커리어 우먼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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