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폭력>
저자 주
주로 여성들에게 경험담을 들은 관계로 이 책에서 언어폭력의 대상(피해자)을 언급할 때 여성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절대 여자는 남자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제가 남성들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독자 여러분 중에 남성이면서도 관계를 개선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수없이 노력한 분, 이 책에 나온 여성들과 자신의 입장이 같다고 느껴지는 분은 본문에 나온 ‘남성’을 ‘여성’으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꿔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가해자는 자신의 학대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심리 조종이나 설득력 있는 깔아뭉개기로—상대방은 알지도 못하는—전쟁에서 승리한다. 만약 그녀가 자신이 깔아뭉개진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 그는 학대 사실을 부인한다. 예를 들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정말 그녀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일까? 파트너는 의아해진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체폭력 가해자는 폭행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한 다음 또다시 폭력을 반복함으로써 상대방을 헷갈리게 만든다. 이 경우 파트너는 자신이 당한 일이 엄연한 폭력임을 알아야 마땅하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캘리포니아주 콩코드의 여성폭력쉼터에서 상담사로 일했던 결혼・가족・아동 상담사인 수전 히라키의 말에 따르면, 가해자의 부인否認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체폭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당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극심한 부인은 피해자를 헷갈리게 만들어 현실 인식 능력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한 피해자는 “언어폭력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게 어떤 것인지 알기 힘들 것이다. 설사 자신이 언어폭력을 당하고 있다 해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 가시 돋친 말은 사랑한다는 그의 주장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으므로, 피해자는 가해자의 말을 믿는 경향이 있다. 진심이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지배와 통제로 힘을 느끼는 A세계에서 사랑의 의미는 상호 존중과 상호 참여를 통해 힘을 느끼는 B세계와는 다를 수 있다.
한편 언어폭력의 가해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에 응한 모든 여성은 가해자로부터 다음에 나열된 말 중 두 가지 이상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학대 정도가 심한 가해자의 경우 다섯 가지 말을 자주 반복해 말하기도 했다.
● 사랑해.
● 나처럼 당신을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 나는 당신을 절대 떠나지 않아.
● 나는 당신을 상처 주는 행동은 하지 않아.
● 나는 그저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가해자의 유형도 각양각색이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무지막지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극도로 까다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까다롭게 구는 일도 어쩌다 한 번이지만 사람의 심리를 쥐고 흔드는 가해자도 있다. 어떤 사람은 늘 화가 나 있고, 또 어떤 이는 다른 남성들과 어울려 사냥이나 스포츠를 즐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가해자도 있다.
언어폭력의 가해자는 다음에 나오는 특징을 몇 가지, 혹은 많이, 혹은 전부 보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 태생적 특성상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가해자는 자신을 묘사할 때 피해자가 느끼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파트너에게 분노에 찬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자신을 원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언어폭력의 가해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1. 짜증을 냄.
2. 자신의 행동이나 감정 폭발에 대해 상대방을 탓함.
3. 예측이 불가능함(무엇이 그를 화나게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음).
4. 화를 냄.
5. (감정 등이) 강렬함.
6. 파트너의 감정이나 관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음.
7. 따뜻함이나 공감을 보이지 않음.
8.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함.
9. 둘만 있을 때 전혀 혹은 거의 말을 하지 않음. 혹은 맞추기가 어렵고 걸핏하면 시비를 검.
10. (피해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세상 좋은’ 사람.
11. 배우자(연인)를 경쟁자로 여김.
12. 시무룩함.
13. 질투심이 많음.
14. 갑자기 화를 내거나 사람을 깔아뭉갬.
15. 무엇이든 비난함.
16.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함.
17. 폭발하기 쉬움.
18. 적대적임.
19.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음.
대개 파트너들은 가해자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는 상호 존중을 추구하지 않는다. 지배와 통제를 원할 뿐이다. 그의 행동은 수시로 바뀌어서 파트너의 판단력을 흐리고, 그녀를 헷갈리게 만든다. 따라서 개별적인 행동보다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 언어폭력을 살피는 방법이 더 유용하다.
언어폭력적 관계에서 ‘진정성 있는 관계’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다. 학대가 이루어지는 관계 혹은 A세계형 관계에서는 진정성 있는 관계가 가진 긍정적 요소들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부정적인 요소들만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