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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14. 2016

07.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깨워라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 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가 뇌가 되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꽉 다문 입술, 무언가에 몰두하기 위해 근육마저도 긴장한 그런 모습을 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생각하는 사람(1880)」은 모두가 기억하는 조각일 것이다.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은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 국립공예실기학교에서 조각의 기초를 공부했다. 하지만 진학에 실패했고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여러 가지 부업을 해야 했다. 이때 하던 일이 건축물의 부속품인 장식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 참전했던 로댕은 제대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작품을 보며 그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로댕은 자신이 생각하던 ‘남자의 누드’ 작품을 만들게 되고, 이 작품을 브뤼셀 미술가 동인전(the Artistic and Literary Circle)에 출품한다. 이 작품이 「청동시대(1877)」인데, ‘실제 사람의 석고형을 뜬 게 아닌가?’하는 논란이 일 정도로 정밀한 조각이었다. 이런 논란은 로댕이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로댕은 건축물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성을 불어넣었다.

 

「생각하는 사람」은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거대한 조각의 집합체인 「지옥의 문(1880~1888)」 상단 중앙에 있는 조각으로 로댕이 20년에 걸쳐 작업한 결과물 일부지만, 「지옥의 문」 자체는 미완의 작품이다. 어쩌면 로댕은 처음부터 완성할 수 없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 앞에서 지옥에 던져져야 하는 인간의 인생과 번뇌, 고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이 팔다리의 근육마저도 ‘생각’에 빠져드는 느낌을 주는 이유다.

 

로댕은 이런 놀라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까? 조각하고자 하는 대상을 생각하는 일이 우선이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정은 자신의 몸이 ‘조각할 준비가 된 것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자신이 하는 조각인데 ‘조각할 준비가 된 것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인지도 의문이 들 것이다. 그는 ‘손이 작업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작업 대상을 끝도 없이 스케치했다. 그 스케치들을 보면 실제 작업 대상을 정밀하게 스케치한 그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댕은 그의 말대로 손의 감각이 작업할 대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무엇을 하는 과정일까? 이것은 이성적 수준으로 ‘머리가 아는 것’을 실제 작업할 ‘몸이 아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몸이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며, 이런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 「지옥의 문」을 20년 동안 작업했음에도 미완의 작품이 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손이 작업 대상을 이해했다고 판단해서 작업했더라도 작품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부숴 다시 재료로 만들어버렸다.

  

로댕만이 작업하기 전에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작품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는 누구나 읽어본 소설일 것이다. 대어를 낚기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는 노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불굴의 의지와 삶의 단면을 읽어낼 수 있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192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1940)」와 같은 작품도 그의 작품이다. 

  


대문호(大文豪)로 칭송받는 그에게 작품만큼이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나는 작품을 쓸 때 서서 글을 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쓰기 전에 연필을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뾰족하게 갈았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서서 글을 쓴 것이고, 연필은 왜 뾰족하게 갈았을까? 그에게 연필을 다듬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이자 발명가, 정치인이자 사업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한 사람이었고, 전기에 관해 능통해 피뢰침을 발명했으며, 인쇄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으며,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Poor Richard’s Almanac)」을 통해 그가 처세술의 대가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돈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덕 없음을 걱정하라.”는 그의 명언도 있지만, “알몸으로 글을 쓸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온다.”는 말도 했다. 이 말은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쓴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의 말이기도 하다.



  

헤밍웨이가 긴 시간 서서 글을 쓰면서 발바닥에 엄청난 체중을 느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가 연필을 뾰족하게 다듬는 것과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빅토르 위고가 알몸으로 글을 쓰는 것은 무슨 관계일까? 로댕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마치 의식처럼 끝도 없이 스케치하는 것과는 또 무슨 관계일까?

  

이것은 감각을 다듬는 것이고,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헤밍웨이가 연필을 가는 것은 감각을 갈아 다듬는 것이었고, 이렇게 감각을 최고로 다듬어야만 최고의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확신했다. 헤밍웨이의 발바닥에 체중이 쏠리면서 느껴지는 고통은 감각에 연결된 정신을 깨웠다. 이들에게 감각은 정신 일부였다. 특히 로댕이나 헤밍웨이, 프랭클린, 위고는 촉각을 깨워 정신을 지배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Stephen Woolf)도 마찬가지였다. 헤밍웨이는 서서 글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편한 자세에서는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영국의 시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시를 쓰기 전에 25잔이나 차를 마셨다. 그에게는 미각을 가다듬는 것은 감각을 끌어올려 정신을 깨우는 작업이었다. 프랑스의 극작가이며 소설가인 알렉산드르 뒤마(Alexandre Dumas)는 소설은 푸른색 종이에, 시는 노란색 종이에, 산문은 장밋빛 종이에 썼다. 뒤마에게 색은 시각을 가다듬어 정신을 깨우는 작업이었다. 소리에 자극받아야 시상이 떠오르는 천재 시인도 있었다. 33세에 생을 마감한 미국의 천재 시인 하트 크레인(Harold Hart Crane)은 시끄러운 파티를 즐기다가 타자기로 달려가 시를 썼다. 그에게 청각은 요정이 들려주는 시의 운율이었다.

  

감각은 좌뇌와 우뇌에 연결된 세계를 인식하는 창이라는 사실을 앞서 확인했다. 이 감각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지만, 다른 감각도 시각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어두운 밤 혼자 걸을 때,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럴 때는 둔한 촉각도 살아난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등에 닿는다면 털마저 쭈뼛해질 정도로 놀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한두 가지 감각을 주 감각으로 활용하면서 다른 감각을 선택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니 감각은 세계를 인지해 탐구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자신의 정신세계를 존재하는 세계로 연결하는 유일한 도구다.

  

놀랍지 않은가? 감각을 공부하는 데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도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신과 감각은 서로 팽팽하게 연결된 끈이다. 한쪽이 느슨해지면 다른 한쪽도 느슨해진다. 하지만 감각과 정신을 담고 있는 껍데기인 육체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육체는 생존의 관점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면 눈마저 감고 싶어 한다. 서서 글을 쓰는 고통스러운 작업은 절대 원하지 않는 것이 육체다. 그러니 육체가 감각이나 정신을 지배하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위에서 설명한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데 탁월했다고 생각하는,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고 창조했던 사람 대부분은 감각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감각을 다루는 비밀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없는데도 감각을 다스리는 방법을, 육체를 제어하는 방법을, 정신을 깨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로댕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스케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석고로 형을 뜨기 전에 작업하고자 하는 대상을 수도 없이 그렸다. 작업하는 내 손이 작업하고자 하는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 본 콘텐츠는 더굿북(http://www.thegoodbook.co.kr)과 동시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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