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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23. 2018

03. 내 몸에 맞는 생리컵 찾기

<생리 공감>




생리컵은 정말 종류가 다양하다. 낮은 자궁, 보통 자궁, 높은 자궁에 따라 컵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평소 양에 따라서, 출산 여부에 따라서 폭이 넓고 용량이 큰 컵을 선택할지 더 작은 컵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단단함도 중요하다. 나보다 더 겁이 많았던 프로듀서는 처음에 가장 부드러운 컵이라고 알려진 스쿤컵(SckoonCup)을 사용했다 낭패를 봤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딱딱한 컵보다 부드러운 컵이 더 편하고 쉽게 들어가리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컵이 어느 정도 단단해야 안에서 잘 자리를 잡는다. 너무 부드럽거나 질 내부에 비해 작을 경우 컵이 움직여 통증이나 이물감을 주고 피가 새기도 한다.


높은 자궁을 가진 사람을 위한 생리컵(왼쪽)과 낮은 자궁을 가진 사람을 위한 생리컵(오른쪽).

촬영 중 다양한 컵을 써 보기 위해 평소에 쓰던 루넷컵보다 훨씬 부드러운 릴리컵(Lily Cup)을 사용한 적이 있다. 릴리컵은 그 이름처럼 튤립 모양이다. 색도 분홍색이라 컵들 중 가장 눈에 띈다. 예쁘고 부드러운 컵을 사용하면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결과는 악몽이었다. 하필 아르바이트로 촬영을 나간 날이었는데 컵이 질 중간에 걸리고 꼬리가 밖으로 빠져나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내내 쓰라렸다. 아픔은 둘째치고 컵을 빼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가서 속옷을 벗었는데 피로 흥건했다. 이 난리를 치른 뒤에야 왜 어떤 여성들은 손으로 잘 접기도 힘든 키퍼(Keeper)를 선택하는지 이해가 됐다. 저마다 제 몸에 맞는 생리컵이 있는 것이다. 키퍼는 현재 판매되는 생리컵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미국에서 만든 제품이고 의료용 실리콘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생리컵과 달리 천연고무로 만들어졌다. 키퍼는 아직 써 보지 못했다. 촬영용으로 구매해 놓았는데 우리 팀 모두 “와, 이거 진짜 단단하다!” 감탄만 하고 누구도 써 보겠다고 자원하지 않은 제품이다. 하지만 천연고무로 만들었고 색소도 넣지 않았으니, 생리컵 중 가장 자연에 가까운 컵이랄까?


판매되는 생리컵 중 가장 오래된 키퍼.



“컵을 중간에 갈아야 할 때는 어떻게 해요?”
  
아직 컵을 사용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어떤 사람은 양이 많은 날에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컵을 빼 피를 버려야 한다지만, 나는 양이 가장 많은 초반 이틀에도 아침에 끼웠다 저녁에 빼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나 촬영감독의 경우 양이 많은 초반 이틀은 중간중간 컵을 빼 피를 버리고 다시 끼워야 했다. 촬영감독은 일회용 컵에 물을 받아 가지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컵을 빼 헹군 뒤 다시 사용했다. 실제로 컵을 사용하면 가장 귀찮고 힘든 게 집이 아닌 밖에서 피를 비워야 할 때다. 생리컵 사용 초반에는 괜히 걱정이 되고 단지 피를 모아 버리는 게 재미있기도 해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컵을 비웠다. 그때 나는 화장실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 재빨리 밖으로 나가 컵을 씻었다. 하지만 그 뒤로 바빠서 깜빡하고 컵을 갈지 않기 시작하면서 내가 양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양이 많은 첫째, 둘째 날도 하루에 한 번 끼우고 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자기 전에 컵에 가득 찬 피를 빼 들여다볼 때의 기분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하리라. 묘한 성취감을 준다. 어렸을 때 흙이나 자갈을 모아서 컵이나 장난감 그릇에 꾹꾹 눌러 담으며 느꼈던 뿌듯함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랄까.
  
생리컵을 쓰기 전까진 내 양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친구들과 생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 둘째 날 양 진짜 많아” 하며 내심 많은 양의 생리혈을 흘린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컵을 끼우고 있는 상태가 너무나 편해 한번은 그 존재를 잊은 적도 있다. 2016년 독일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보러 갔다가 친구들과 프라하로 여행을 갔다. 꼬박 하루를 이동했는데 컵을 잊은 것이다. 생리 끝 무렵이어서 더 자각을 하지 못했다. 다시 독일로 와 친구 집에서 잠을 자다 문득 생각이 나 48시간 만에 컵을 뺐다. 컵에는 분비물과 피가 섞여 노란색을 띠는, 곰팡이가 될 것같이 부글부글 끓는 상태의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피와 분비물이 너무 오랜 시간 따뜻한 질 내부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생리컵은 최대 12시간 간격으로 비우고 씻어 줘야 한다.
  
  
기특한 나의 몸
  
생리컵을 사용한 지 3년 차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생리가 터지면 서랍에 있던 생리컵을 꺼내 바로 접어 질에 밀어 넣는다. 우주선이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듯 컵은 자연스럽게 질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나는 손에 묻은 피를 세면대에 씻어 낸 뒤 곧바로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나한테 맞는 컵을 찾았고, 내 질에 잘 들어가게 컵을 접는 방법도 터득했다. 하루 종일 컵을 차고 있어도 피가 새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 피가 흐른다는 자각도 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자기 전 샤워를 하면서 컵을 비운다.
  
하루 동안 소중히 모아 온 피를 하얀 변기에 버리면 새빨간 피가 퍼져 나간다. 이 피는 굉장히 진하고 진득해서 레버를 한 번 내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가끔 다 씻겨 내려가지 않은, 남아 있는 피를 가만히 서서 내려다본다. 저렇게 많은, 진하고 강한 피를 흘리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낸 내 몸이 기특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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