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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29. 2016

08. 우주소녀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신경이 예민한 천재 예술가들은 간혹 누군가 자신을 적대시하고 악의적인 공격을 할 것 같은 피해의식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과 우울증, 과도한 피해망상으로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외톨이를 자처했고, 결혼도 하지 않고 작품을 자식처럼 생각했다. 평소 대인관계에 미숙했던 천경자 역시 피해망상과 고독감으로 응집된 에너지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많은 문인 및 화가 등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독감을 어찌하지 못해 항상 외로워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피해의식이 점차 커지자 그녀는 성모마리아처럼 자신을 구원할 초인적인 자아상을 갈구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지혜에 초월적인 힘을 겸비한 존재를 설정하고 그와 동일시를 꿈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인상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SF영화에서 착상하여 별나라에서 온 우주 소녀를 모델로 삼았다.

우주 소녀는 길례 언니처럼 청순하고 순진한 처녀상이 아니라 달콤한 맛을 다 빼고 쓴맛이 풍기는 마녀 같은 자아상이다. 천경자는 우주 소녀가 별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지구에서 한없이 외롭겠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과 지혜를 통해 고독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별나라에서 왔으니까 모든 것이 새롭겠지요. 하도 외로워서 어떤 한 같은 의식이나 감정을 갖게 되겠지요. 그러나 이 소녀는 얼마 후엔 지구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보다도 더 많은 가능성을 갖게 되겠지요. 그래서 고(孤)와 한을 아름다운 지혜로 승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게 되겠지요."

우주 소녀를 형상화한 <황금의 비>는 1970년대 후반부터 눈에만 일부 사용했던 금분을 전체적으로 사용하여 금속성의 느낌을 내고 있다. 이러한 금색은 화려함과 달콤함을 제거하고 차갑고 강인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색이다. 과거 그림에서 나타난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과 나비는 이제 금빛 비를 뿌릴 듯하고, 긴 목의 여인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강렬한 눈매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온 세상을 삼켜버릴 듯한 강렬하고 싸늘한 눈빛은 4차원적 초능력과 통찰력으로 자신에게 닥칠 운명조차 미리 알고 있는 듯하다.

<황금의 비>, 1982, 종이에 채색, 34x46cm


이처럼 긴장된 얼굴에 동공이 열려 있는 여인의 눈빛은 1980년대 작품 속 인물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강인하고 강렬한 표정의 우주 소녀는 뱀과 더불어 나약한 천경자 자신을 지켜줄 수호신으로서의 자아상이다.

<어느 여인의 시 2>에서 우주 소녀는 사막 같은 황량한 공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소녀는 아무도 모르는 낯선 지구에서 외롭고 고독하겠지만,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해 보인다. 가슴에 그려진 가시 돋은 장미꽃은 아름다운 환상을 쫓는 자신의 꿈과 아름답지 못한 현실에서 고통과 한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소녀는 자신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잊으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물도 감정도 없는 싸늘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어느 여인의 시 2>, 1985, 종이에 채색, 60x4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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