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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29. 2016

06. 56시간의 바다

<여행의 이유>

통영은 바다 그 자체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통영. 그곳에서 만난 바다는 어디를 가든지 새파랬다. 깊은 곳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보다 짙은 남빛으로 빛났고, 얕은 곳은 모네의 ‘흰색 수련 연꽃’보다 화사한 연둣빛으로 반짝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 눈부셔서 눈물이 고였다. 태양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바다를 태운다.

통영으로 가는 고속버스의 진동이 몸을 흔든다. 4월에 만난 바다를 잊지 못해서 통영에 또다시 이끌린다.

7월, 서울 하늘은 아침 7시인데도 어두컴컴했다. 5시간을 달려 통영에 도착하니 이제야 해가 나지만, 하늘에 새털구름이 껴서 하얗기만 하다. 동피랑 마을로 가려고 방죽을 따라 걸었다. 길에서 만난 바다는 4월보다 색이 탁하다. 수면 위가 비둘기로 가득 찬것 같다. 친구들에게 통영 바다를 예찬한 게 떠올라서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곁눈질하니 그들은 거북선 모형에 정신이 팔렸고, 어시장의 소란스러움에 흠뻑 취했다. 서늘하던 등이 한여름의 더위에  뜨끈해진다.

동피랑 마을은 입구부터 오르막길이다. ‘동쪽 비탈’이란 이름답다. 방죽을 따라 걷고, 언덕을 올라왔을 뿐인데 등과 겨드랑이 부근의 옷 색이 진해진다. 한낮의 햇살은 머리카락을 숯불로 만든다. 정수리에서 나는 김으로 훈제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벽화의 마을이다. 2007년 10월에 ‘푸른 통영 21’이라는 시민단체가 마을 벽을 그림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시에서 동피랑 마을을 철거하려고 했는데, 벽화로 유명세가 생겨서 지금은 통영의 명소가 됐다.

처음 만난 그림은 ‘용암과 절벽 입체화’로, 바닥에 그려져 있다. 덧칠을 안 하는지, 물감이 벗겨져서 시멘트 바닥이 드러났다. 마을 내부의 벽화도 볼품없을까 봐 발걸음이 느려졌다. 옆으로 굽은 골목에서 꺾자 웬걸, 선명한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 안나 등을 만났다. 

ⓒ김하늬 통영 동피랑


벽화 속에서 캐릭터는 무더운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털옷을 입었다. 굽이굽이 길을 따라 걷자, 붉은 동백꽃이 활짝 핀 벽이 나왔다. 벽화 앞 의자에 앉아서 3월 같은 7월을 즐겼다.

골목 어디서든지 고개를 들면 통영 앞바다가 펼쳐진다. 방죽에서 내려다봤을 때보다 잿빛이 더 섞여서 암청색으로 보인다. 친구들을 쳐다보자,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들은 바다가 아니더라도, 통영을 충분히 즐긴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일정을 헤아려보았다. 내일 소매물도에 간다. 배를 타면 지금보다 원색의 바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에 대한 미련을 내일로 미루고, 친구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김하늬 통영 동포루



마을 비탈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자 정자가 나온다. 이곳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統制營)의 동포루(東舖樓)다. 포루(舖樓)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하여, 그 위에 지은 목조건물을 말한다.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했다는데, 그들도 통영항의 아름다움에 꽤나 취했을 것 같다. 시내와 강구안 항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많은 사람이 정자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우리도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통영에서 꽤 높은 곳이라 바닷바람도 솔솔 불어온다. 옷 뒤판에 땀으로 생긴 세로줄을 조금씩 말렸다. 포루에 기대서 사진 찍고, 강구안 항구도 내려다봤다. 실구름이 하늘을 감싸서, 태양은 한풀 꺾여 우리를 쬔다. 배 몇 척이 부두에 묶여 있다.

다음 날, 우리 배도 부두에 단단히 잡혔나 보다. 기상 악화로 소매물도행 배가 운항하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통영에서 바라본 바다도 나를 설레게 했지만, 고흐의 작품과 모네의 작품이 떠올랐던 건 소매물도의 바다를 만났을 때였다. 그 섬에 가고 싶어 통영에 온 거였는데, 그리운 바다를 이번 여행에서 만나긴 글렀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내일까지 구름이 자욱하다. 친구는 돌아다닐 때 햇볕에 타지 않을 거라고 좋아한다. 나는 친구를 할긋 흘겨봤다.

오전에 방문하려 했던 소매물도행 배가 취소되었으니, 대신 갈 수 있는 섬을 찾았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인 장사도가 물망에 올랐다. 드라마에서 도민준이 천송이와 순간 이동했을 때, 섬에 빨간 동백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장사도는 3월에 동백꽃이 피면 섬 전체가 불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해서 한려해상국립공원 일부로 지정되었다. 한여름에 가면 꽃은 없고, 드라마 후광에 사람만 많을 것 같다. 볼 게 없을 것 같아 께끄름한데, 친구들은 장사도에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푸른 바다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죄목을 안고 있다. 제안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막상 도착하자 장사도는 동백 대신 수국으로 물들어 있다. 돌담을 따라 분홍색, 연보라색, 하늘색 수국이 피었다. 붉은 장미를 닮은 협죽도, 라일락처럼 생긴 붓들레아 등 여러 종류의 꽃도 만발했다. 소책자에 적힌 순서대로 섬을 구경했다. 장사도는 어느 대부호의 정원 같다. 길을 붉은 벽돌과 편평한 돌로 다듬어서, 모난 곳이 없다. 나무를 길 가장자리에 줄지어 심어서, 한여름에도 나무그늘이 길을 채운다. 드라마에 나온 동백나무는 터널처럼 동그랗게 길을 감싼다. 온실에 들어가면 열대성 식물과 앵무를 만난다. 전망대와 공연장도 있다. 섬이 아니라 공원에 산책 나온 기분이다.

ⓒ김하늬 통영 장사도



전망대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봤다. 절벽에 가까운 바다마저 연녹색으로 투명하지 않고, 회청색으로 불투명하다. 바다 안개가 심해서, 근처 섬의 윤곽과 수평선이 뿌옇다. 하늘은 새털구름으로 덮여 있다. 많은 빛이 해수면에 닿아야 바다가 새파래진다. 오늘도 하늘과 바다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있다. 이것들이 햇살과 바다의 만남을 방해한다. 친구에게 안개 때문에 소매물도행 배가 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고 꽃 앞에 서서 내게 손짓한다. 나는 눈썹을 내리고 함께 사진 찍었다.

3개월 전에 통영을 구경했는데도 다시 온 건, 아름다운 바다를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서였다. 그렇지만 오늘의 일기예보가 4월의 날씨와 다르므로, 바다의 모습이 바뀌는 게 당연했다. 언제나 똑같이 판단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생각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나는 왜 자연이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길 바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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