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주지 않을 수 없기에 사랑을 주다.

<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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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지쳐 결국 이별을 택한 두 남녀는, 과학의 힘을 빌려, 서로가 사랑했던 시간들까지 아예 기억에서 지워내기로 한다. 서로를 떠나보냈지만, 그와 그녀를 따라가지 않은, 상처로 들러붙어 있던 기억들을 차라리 들어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망각과 망각 사이에 여전히 놓여있었던 인연의 끈은, 다시 한 번 서로를 서로의 앞에 데려다 놓았고, 그와 그녀는 마치 처음인 것만 같은 두 번째 사랑에 끌리게 된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서 지워냈던 그와 그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기억에서 지워낸 이별까지도 재연이 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러닝타임 내내 그들을 비추는 태양은 겨울의 햇살이다. 다른 계절만큼이나 환하지만 그다지 따뜻하지는 않은…. 여전히 사랑의 속삭임을 습관적으로 내뱉지만, 더 이상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그런 사랑. 내가 여기 있고, 너 역시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조도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아닌….

인연을 확신할 수 없는 거리에서 서로에게 끌리던 설렘. 거절이 두려워서, 용기가 나지 않아서,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는 불안한 마음은, 상대를 늘 내 시선 안에 잡아두기도, 인연에 대한 기대로 우연을 가장해 서로의 시선 안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껏 지켜볼 수 있는 사이가 되면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랑은 조금씩 식어가고 그 냉각의 속도만큼으로 사람은 지쳐간다.


1.jpg?type=w1200 이영철, <사랑은 꽃길로 온다>, 61x45cm, acrylic on canvas, 2014.


사랑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인 줄 알았던’ 모습에 끌렸던 그녀와 ‘그녀인 줄 알았던’ 모습에 끌린 그가 만나 사랑을 한다. 사랑의 주체는 그와 그녀라기보단, 그일 줄 알았고 그녀인 줄 알았던 오해의 조건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꺼풀의 착각을 벗겨낸 커플은, 미지 뒤에서 있던 예전의 그와 그녀를 추억하며, 서로에게 따져 묻는다. 내가 알던 그와 그녀는 어디로 갔냐고….

새삼 알아버린 그와 그녀에게서 주고받은 실망과 상처를 그럭저럭 용서하며 끌어안기도 하지만, 포화점을 넘어버린 앎은 오해로서나마 행복했던 추억에 맺히는 눈물이 되어, 사랑의 끝자락에서 꺼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는 작은 불씨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싸늘히 식어간 심장이 지어보이는 차가운 미소를 상대의 마지막 시선에 건네며 굳이 이별의 승자가 되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사랑의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이유도 단순하다. 더 이상 너를 견디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훗날 뒤늦게 도래하는 깨달음은, ‘너’이길 바랐던 내 이기적인 욕망과 관대한 ‘나’ 인줄 알았던 합리적 착각 사이에 방치된 무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사랑과 이별은 그 무지의 결과였다. 아울러 찾아오는 각성은, 너와 향했던 사랑이란 것이 실상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과, 내 틀에 맞춰질 수 없어서 덜어내어 버린 너를 사랑하지 못한 나였다는 사실이다.

니체가 내린 사랑의 정의는 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답지 않게 순애보를 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잇대어지는 해석은 니체답게 까칠하다. 사랑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사랑할 때가 아니라 헤어진 후에 비로소 깨닫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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