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스 프롬 파리>
미아는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다. 집이 아닌 데다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던 터라 잠에서 완전히 깨려면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고 다이지를 찾았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주방 조리대에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고, 오래된 사기 접시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넌 잠이 필요해. 이따가 레스토랑으로 와.>
미아는 전기 포트를 켜놓고 창문 앞으로 갔다. 낮에 보는 전망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미아는 오늘 하루 그리고 다음 날들을 어떻게 보낼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오븐의 전자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다비드가 혼자 있을 때 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상상했다. 내가 없는 틈에 무슨 짓을 할지 알고? 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고 마침내 자신을 그리워하길 바라는 게 맞는 것이었을까? 그를 되찾으려면 집을 비우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런 수수께끼의 열쇠는 누가 쥐고 있는 거지?
미아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원치 않는 게 뭔지는 알고 있었다. 의심, 기다림, 침묵이 싫었다. 아침에 눈 뜨면 일어나고 싶고, 살고 싶은 의욕을 되찾고 싶고, 더는 스트레스 때문에 속이 뒤틀린 상태로 잠을 깨고 싶지 않은 것, 그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니.
하늘이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조짐이 좋았다. 바로 다이지에게 갈 게 아니라 몽마르트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윈도쇼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다 언덕의 캐리커처 화가에게 초상화를 부탁하는 것도 괜찮고. 키치지만, 그냥 캐리커처를 갖고 싶었다. 여기서는 영국과 달리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테니, 생각만으로 그치지 말고 실컷 자유를 누리며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는 거야.
미아는 여행 가방을 뒤져서 편한 옷을 꺼내 입었다. 친구 집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얗게 칠한 책장, 책 무게에 휘어진 선반들. 누군가가 낮은 탁자에 놓고 갔다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들고 담배 주인의 신원을 드러내줄 단서를 찾아봤다. 다이지의 남친은 어떤 남자일까? 어쩌면 사랑하는 남자일지도 모르는데. 다이지가 누군가와 인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다비드에게 전화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비드가 조연 여배우에게 홀딱 반했던 영화, 그 촬영 이전으로 거슬러가고 싶었다. 바람피운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미아는 남편이 자기 면전에서 벌인 애정 행각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테라스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를 쳐다봤다.
창고를 개조한 유리방 안에 책상이 놓여 있었다. 미아는 들어가서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이지의 노트북은 전원은 들어오는데 창이 열리지 않았다.
미아는 휴대전화를 들고 친구와 문자메시지로 대화를 시작했다.
미아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메일함에 접속하자, 어디 있는데 전화도 받지 않느냐고 묻는 크레스턴의 메일이 하나 있었다. 한 패션 잡지에서 르포 기사를 쓰기 위해 미아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니 가능한 한 빨리 답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아는 답장을 썼다.
친애하는 크레스턴,
한동안 떠나 있을 거예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어요. 내가 ‘아무에게도’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시키는 역을 해내려면 감독, 촬영기사, 당신의 어시스턴트 또는 당신의 지시가 없는 곳에서 혼자 지낼 필요가 있어서. 이 년 동안 거역이란 걸 해볼 여유가 거의 없었어요. 패션 잡지의 제안에는 응하지 않겠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내가 어제저녁 유로스타에 올라서 내린 결정 중 첫 번째는 더는 복종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단 며칠만이라도 내가 이럴 수 있다는 걸 나 자신에게 입증할 필요가 있어요. 파리는 날씨가 아주 좋아서 지금 산책 나가려는 중이라……. 또 소식 전할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눈에 띄지 않게 지낼 거니까 안심하고요.
안녕.
미아.
미아는 다시 읽어본 다음 ‘보내기’를 눌렀다.
그러다 화면 상단에 있는 작은 아이콘에 호기심이 동해서 클릭했다가 데이트 사이트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미아는 다이지의 파일을 뒤져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꼭 그러겠다고 맹세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다이지가 알 턱도 없는데, 뭐.
미아는 친구가 골라놓은 남자들의 프로필을 훑어봤고, 몇몇 메시지를 읽다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중 두 개가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에 한 줄기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이 가상 세계를 떠나 바깥 세계로 나갈 때가 된 것이었다. 미아는 노트북을 끄고 현관에 걸린 얇은 외투를 걸쳤다.
그녀는 아파트 건물을 나와 테르트르 광장 쪽으로 올라갔다. 한 갤러리 앞에 멈춰 섰다가 다시 걸었다. 관광객 부부가 미아를 쳐다봤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미아를 가리키며 남편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해, 당신이 가서 물어보든가!”
미아는 잰걸음으로 제일 먼저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부부가 카페 유리창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미아는 카운터에 몸을 바짝 붙이고 비텔 생수 한 잔을 주문하면서 거리를 비추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집요한 부부가 기다리다 지쳐 사라지길 엿보다가 계산하고 카페를 나왔다.
테르트르 광장에 이르렀다. 미아가 작업 중인 캐리커처 화가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청바지에 재킷 차림, 멋진 외모를 가진 남자가 상냥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혹시 멜리사 바로우 아니세요? 멜리사가 나오는 영화를 전부 다 봤거든요.” 그가 완벽한 영어로 말했다.
멜리사 바로우는 미아 그린버그의 예명이었다.
“파리에서 영화 찍나요, 아니면 휴가 중이세요?” 젊은 남자는 계속 물었다.
미아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여기가 아니라 런던에 있어요. 댁이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그냥 나를 닮은 여자일 뿐이죠.”
“그럼 사과해야 되는 건가요?” 남자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사과할 사람은 나죠. 내가 하는 말이 댁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나한테는 의미가 있거든요. 실망했어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세요.”
“멜리사 바로우가 어떻게 나를 실망시키겠습니까, 그녀는 영국에 있는데요?”
젊은 남자는 몇 걸음 물러서서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다 이렇게 말했다.
“억세게 운 좋은 어느 날 런던 거리에서 그녀와 마주치면, 세상은 좁으니까요, 멋진 배우라고 전해줄래요?”
“꼭 그렇게 전하죠. 몹시 기뻐할 거라고 확신해요.”
미아는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안녕.” 미아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좀 걷다가 한 헤어숍을 점찍었다. 크레스턴이 잔소리 깨나 늘어놓을 게 틀림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를 자르고 싶은 충동이 더 일었다. 미아는 문을 밀고 들어가서 헤어숍 의자에 앉았고, 한 시간 후 짧은 갈색 머리로 나왔다.
미아는 변장술이 통하는지 시험해보기로 작정하고 사크레쾨르 대성당 계단에 앉아서 기다렸다. 영국 국기가 찍힌 관광버스 한 대가 대성당 앞에서 멈춰 섰기 때문에 미아는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 무리를 인솔하는 가이드에게 시간을 물었다. 예순여 명의 관광객 중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미아는 새 얼굴을 선사해준 미용사가 고마웠다. 마침내 그녀는 파리에 여행 온 평범한 익명의 영국 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