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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ug 01. 2016

05. 딱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이누야마 이쿠코는 세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72년 11월의 일이다. 맏딸과는 일곱 살, 둘째 딸과는 다섯 살 터울이 있다. 가족 모두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이쿠코 자신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는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

두 언니는 언제나 같이 놀았다. 그러나 이쿠코는 대개 혼자 놀았다. 집 안보다 바깥을 좋아했다. 당시 살았던 집 근처의 병원 마당, 얼굴에 흉터가 있는 할머니 — 그 할머니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하고 이쿠코는 종종 생각한다 — 의 두부 가게 앞, 그리고 집 앞길에서 놀았다.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았다.

주홍색 부삽을 들고 다녔던 기억도 있다. 그 부삽으로 여기저기 흙을 파서 벌레를 찾아내 바라보곤 했다. 곱돌이나 분필로 길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스스로 고안한 돌차기 비슷한 놀이를 하염없이 한 적도 있었다.

부삽과 곱돌은 아빠가 사다주었다. 아빠는 음식점을 하는 덕에 낮에 집에 있는 일도 많았다. 아빠가 놀아주거나 가족끼리 놀러간 기억은 없지만, 그 대신 느닷없이 산책을 하자면서 세 딸 중 하나를 데리고 나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주거나 잡화점에서 부삽을 사주곤 했다.

부모님이 이혼한 것은 이쿠코가 스물한 살 때 일이었다. 원인은 아빠의 외도였다. 

하지만 아빠는 그 여자와 결국 헤어져 지금은 에코다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이쿠코는 간간이 아빠를 찾아간다.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 얼마 안 있어 죽기 때문이다. 이쿠코에게 부모님의 죽음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아니 이미 가까이에 와 있는 무엇이었다.

12월.

오늘도 이쿠코는 여섯 시에 일어나 단팥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천을 들어 올리고 텔레비전을 켜 일기예보를 보고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천을 덮었다.

아침마다 엄마에게는 확인 전화를 걸면서 아빠에게는 걸지 않는 이유는 이쿠코 자신도 모른다. 이혼 직후, 아빠 옆에 다른 여자가 있어서 그만큼 엄마가 딱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어느 모로 보나 연기는 아닌 후련한 표정으로,

“엄마는 줄곧 혼자이고 싶었어. 속이 다 시원하네, 너무 좋다” 

하고 말했을지언정.

실제로 엄마는 활기차게 살고 있다. 만나러 가면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을 만들어준다. 보통 때는 책을 — 옛날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 마음껏 읽으며 지내고 있다.

하기야, 하고 나갈 준비를 하면서 이쿠코는 생각한다. 준비래 봐야 간단하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스킨을 탁탁 두드려 바르고 옷을 입을 뿐이다.

하기야, 어떻게 보면 아빠도 잘 지낸다. 새 여자가 아빠 곁을 떠났을 때도 딱히 의기소침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쿠코는 크림색 블라우스에 짙은 갈색 치마를 입고, 짙은 갈색 타이츠를 신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은 침실에 놓여 있다. 거울 앞에는 낡은 신문이 한 부 — 날짜는 1993년 1월이고, 절반으로 접힌 채 누렇게 색이 바래고 말라서 거의 바스러질 지경이지만 — 놓여 있고, 구두를 신은 채 거기 서서 거울을 본다.

코트를 걸치고 직장으로 향한다. 교관은 80퍼센트가 남자지만, 사무직은 거의 여자다.

“여자가 많은 직장은 정말 싫다니까.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전문학교 시절의 친구 사토미 말은 그렇다. 하지만 이쿠코는 그렇게 느낀 적이 없다. 사토미가 짜증스럽게 느끼는 것은 아마 그녀 자신이 짜증스러운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을 것 같고, 조금은 부러운 성격이다.

일을 일찍 시작하는 날은 여덟 시에서 다섯 시까지 일한다. 이쿠코는 그동안, 손님인 ‘학생들’하고만 대화를 나누는 날도 있다. 물론 업무상 필요할 때는 다르다. 동료가 점심을 같이 나가서 먹자고 하면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정식을 먹는 일도 있다. 그런 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지만, 자기가 먼저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고 불편할 일은 없다.

어떻게 하면 짜증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이쿠코는 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화창한 겨울날.

남편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차고에 똑바로 선 채 아사코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부드러운 파랑과 부드러운 하양. 모네의 그림 같은 하늘, 이라고 멍하게 생각한다.

빗자루와 쓰레받기와 비닐봉지. 아사코는 좁은 차고를 쓴다. 구석에 낙엽이 모여 있다는 것은 알지만, 과자 봉지가 널려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집 앞길이 동네 중학교 통학로이기 때문인지 과자 봉지는 물론 때로는 먹다 만 고로케가 떨어져 있기도 한다. 지나가는 사람은 남의 집 앞에 아무렇게나 뭘 버린다.

청소를 끝낸 아사코는 만족스럽게 사방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아사코의 남편은 깔끔한 것을 좋아해서 지저분한 곳이 있으면 언짢아한다.

비닐봉지를 묶어 마당에 있는 쓰레기통에 밀어 넣는다. 상큼해진 기분으로 가볍게 — 조금은 설레는 걸음으로 — 집 안에 들어간 다. 자신도 모르게 아사코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DON’T LET ME DOWN」의 후렴구다. 아사코는 그 노래를 비틀스가 아니라 피비 스노우의 곡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곡이다.

고등학생 시절. 불쑥 환희가 끓어올라 아사코는 미소를 머금는다. 고등학생 시절, 얼마나 무지했는지 모른다. 연애에 대해서도, 남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 하나 없었다.

자신이 벗은 샌들 앞코에 낙엽이 하나 붙어 있는 것을 보고서, 아사코는 미간을 찡그린다. 현관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그것을 떼어낸다. 언짢아할 때의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별 이유도 없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다고 하는데, 아사코의 남편은 물론 그러지 않는다. 그가 언짢아할 때는 이유가 있다. 그것도 아주 합당한 이유가.

낙엽 한 장을 손에 쥔 채, 아사코는 현관에 서 있다. 신발장 위에는 조개껍데기 몇 개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다. 여름에 남편과 바다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다.

아사코는 결혼한 지 7년이 되었다. 조개껍데기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콧노래는 이제 부르지 않고 있다.

“이누야마 씨.”

복도에서 누가 불러 돌아보니, 얼마 전에 두 번 잔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스물여섯 살에 몸집이 자그마하고 귀엽게 생겼다.

“안녕.”

이쿠코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별 관심 없었지만, 마주쳤다고 불쾌하지는 않았다.

“시험, 어땠어?”

남자는 한쪽 팔에 헬멧을 껴안은 채, 쑥스럽게 미소 짓고는 “뭐, 그런대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오토바이 면허를 따면 같이 타자고 약속했었다. 축하로 밥을 사주겠다고도. 창문으로 코스가 보이는 복도에서 이쿠코는 미소를 머금는다.

“오늘?”

그게, 하면서 남자는 맥없는 표정으로 이쿠코를 본다.

“둘이 타기에는 아직 자신이 없어서. 밥만 먹으면 안 될까?”

정말 밥만 먹고 끝날지는 의문이었지만, 이쿠코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을 이 남자와 같이 먹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다섯 시에 끝날 거야.”

“알아. 시부야, 괜찮아?”

시부야에 좋은 갈비구이집이 있다고 한다. 이쿠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겨울날의 썰렁한 창밖을 바라본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것은 이런 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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