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스 프롬 파리>
폴은 급하게 관광 일정을 짰었다. 주특기인 배짱으로 에펠탑 밑에 길게 늘어선 줄을 새치기해서 한 시간을 벌었다. 에펠탑 꼭대기에서는 현기증이 나서 밧줄을 꽉 붙잡은 채 난간에서 멀찍이 떨어져서는 자기는 파리를 구석구석 잘 아니까 아서와 로렌 둘이서 실컷 감상하라고 말했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도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체면을 완전히 구겼지만 폴은 다음 코스인 튈르리 정원으로 친구들을 안내했다.
회전목마를 타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자 로렌은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서 나탈리아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서 아서를 불렀다. 그 틈에 폴은 먹을 걸 사러 갔다.
로렌이 멀어져 가는 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아서는 아들과 통화하고 있었다.
로렌은 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휴대폰에 대고 아들에게 온갖 애정 표현을 쏟아냈다. 파리에서 선물을 가져갈 거라고 약속했고, 아들이 엄마를 그렇게 많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약간 서운해했다. 아들은 대모 집에서 아주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로렌이 아들에게 입맞춤을 보내고 전화가 끊긴 다음 아직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을 때 폴이 한 손에 솜사탕 세 개를 들고 아주 힘들어 죽겠다는 티를 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떤 것 같아?” 로렌이 속삭였다.
“나? 아니면 조?” 아서가 물었다.
“조는 전화 끊었어.”
“근데 왜 통화하는 척하는데?”
“폴을 조금 있다 오게 하려고.”
“폴은 행복한 것 같아.” 아서가 대답했다.
“당신은 거짓말하면 얼굴에 표가 나.”
“비난은 아니지?”
“그냥 사실 확인. 폴이 끊임없이 혼자 중얼거리는 거 봤어?”
“많이 외로우면서도 인정하질 않아.”
“누구 있는 거 아냐?”
“나도 파리에서 사 년이나 독신으로 살았는데, 뭐.”
“당신은 나한테 푹 빠져 있었어. 그러면서도 매혹적인 꽃집 아가씨랑 연애한 사람 아니던가?” 로렌이 응수했다.
“폴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한국에 사는 여자랑. 그 여자랑 거기서 정착할 생각도 있는 것 같고. 한국에서는 폴의 소설에 대한 반응이 엄청난 모양이야.”
“한국에서?”
“응,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니고, 또 터무니없는 계획이라고 생각하지만.”
“왜? 폴이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면 그럴 수 있잖아?”
“근데 그 여자는 폴을 그만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폴은 비행기 공황장애가 있어.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한국에서 외롭게 사는 폴, 상상이 돼? 파리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타는 것도 엄두를 못 내는데.”
“당신이 막을 권리는 없어. 폴이 그러고 싶다면.”
“설득해볼 권리는 있지.”
“우리가 지금 같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거 맞아?”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한 폴이 단호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도 조와 통화해도 되지?”
“방금 끊었는데.” 로렌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로렌은 휴대폰을 집어넣으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둘이 또 무슨 짓 꾸미지?”
“전혀.” 아서가 대꾸했다.
“걱정 마, 둘이 여기서 지내는 동안 들러붙지 않을 거니까. 이 기회에 같이 놀고 싶지만 둘만의 시간을 조용히 보내게 해줄 거야.”
“우리도 같이 놀고 싶어, 아니면 파리에 왜 왔겠어?”
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리 있는 말이다.
“분명히 둘이서 뭔가 꾸미고 있었어. 무슨 얘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내가 데려가고 싶은 레스토랑에 대해. 파리에 살 때 내가 자주 가던 곳이거든. 이제 집에 들어가서 쉬게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관광객 놀이를 할 수 없어.” 아서가 말했다.
폴은 받아들였다. 세 친구는 카스티글리온 거리로 접어들어 리볼리 거리까지 걸었다.
“조금만 가면 택시 승차장 있어.” 폴이 횡단보도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 순간 신호등이 바뀌었고, 아서와 로렌은 폴을 쫓아갈 시간이 없었다.
횡단보도가 그들을 갈라놨다.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로렌은 버스에 붙은 광고판을 봤다.
<이 버스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지하철을 탄다면 몰라도…….>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
로렌이 팔꿈치로 아서를 툭 쳤고, 둘은 눈으로 버스를 좇다가 서로를 쳐다봤다.
“설마, 아니지?” 아서가 속삭였다.
“쉿, 폴이 듣겠어.”
“폴은 절대로 저런 사이트에 가입하지 않을 거야.”
“누가 그래? 폴이 가입한다고.” 로렌이 짓궂은 어조로 내뱉었다.
“운명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손을 내미는 건 우정이다……. 뭐 기억나는 거 없어?”
그렇게 말하고 로렌은 아서를 기다리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