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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ug 01. 2016

06.  낭만주의자라서 결혼하자는 말도 할 수 있는 것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그날 밤, 이쿠코의 일기는 오랜만에 세 페이지나 이어졌다. 새끼 고양이 무늬 잠옷 위에 조끼를 껴입은 모습으로 이쿠코는, 깨알처럼 작고 — 다들 그렇게 말한다 — 어린애 같은 글자로 소박한 대학 노트에 세 페이지나 빽빽하게 일기를 썼다.

이쿠코의 일기는 언제나 심오한데 오늘 내용은 한층 묵직했다. 중심 테마는 사람은 뭘 위해서 사는 것일까, 이다. 이쿠코는 끝에 피그렛이 달린 볼펜으로 써내려갔다. 사람은 오직 어떤 유의 인생을 만들어가려는 목적으로 평생을 살고 있으며, 가능하면 —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 그 작업은 중간부터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가능하면, 만들어간 그 ‘어떤 유의 인생’의 결과로 아이를 낳아 — 따라서 그 ‘타인’은 이성이 바람직하다 — , 살아 있는 생물로 자신이 살았던 한 시대를 다른 시대의 생물에게 넘겨주어야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애, 라고 썼다가 이쿠코는 그 두 글자에 선을 두 번 좍좍 긋고 착각, 이라고 바꿔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착각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에게 가장 올바른 ‘타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요약하면 그런 내용이다. 글을 쓸 때는 습관적으로 푸석푸석한 머리에 헤어밴드를 하고 콘택트렌즈가 아닌 안경을 낀다.

그날 같이 갈비구이를 먹고, 아파트까지 데려다준 남자는 일기에 등장하지 않았다. 이쿠코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지나간 일은 써봐야 의미가 없다.

“나, 이쿠코 일기 본 적이 있거든.”

내열 잔에 따른 소주 칵테일을 홀짝거리면서 하루코가 말했다. 뜨거운 물에 보리와 감자 소주를 절반씩 섞은 칵테일을 좋아한다. 깊고, 은은한 냄새가 난다.

“일기를?”

뉴스를 보고 있던 구마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하루코를 본다.

“언제?”

꽤 오래전, 이라고 대답하고 하루코는 일어나 부엌에 가서 살라미를 가져왔다. 살라미를 프티나이프로 얇게 자른다.

“그래도 그 아이는 숨기고 그러지 않아. 보여달라고 하면 언제든 보여주고.”

얇게 자른 살라미 한 장을 입에 넣고는 잠시 후 하루코가 얼굴을 찡그렸다.

“껍질.”

혀에 남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재떨이에 버렸다. 구마키 역시 얼굴을 찡그리고는 하루코의 무릎에서 도마와 함께 살라미와 나이프를 가져간다.

“그야 살라미니까 껍질이 있지.”

얇게 저민 소시지 한 장 한 장에서 구마키가 얇은 껍질을 말끔하게 떼어내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루코는, 이 사람이 살라미를 꺼내와 내게 줄 때는 늘 이렇게 했었나 보네, 하고 생각한다. 살라미는 껍질이 있는 거구나, 하고.

“이쿠코는 옛날부터, 그러니까 적어도 중학생이 되기 전부터, 인생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 일기를 썼어. 내가 본 건 그 아이가 고등학생 때였는데, 성모마리아는 왜 처녀일까, 그런 의문에 대해서 쓴 거였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아이 해석이 노트에 빽빽하게 적혀 있는 거야. 그래서 야, 이거 안 되겠네, 그렇게 생각했지.”

하루코는 오늘 거래 하나가 성사되어 기분이 좋다. 하루코 회사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한 거래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큰 액수의 거래였다. 하루코의 주특기 패턴이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질적으로는 큰 계약.

“안 되겠다고? 왜?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일기를 쓰는 게 뭐가 이상해서?”

구마키의 여유로운 말투에 하루코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해진다.

“뭘 모르네.”

하루코는 일어나 방구석에 그대로 놓여 있는 버킨백을 가져온다. 몇 년 전에 보너스를 탁탁 털어 본점에 주문해서 산 짙은 감색 버킨백이다. 오늘 중에 반드시 훑어봐야 하는 자료가 들어 있다.

“인생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야.”

몸을 굽혀 가방 안을 뒤지면서 말하자, 구마키가 등을 껴안았다. 구마키는 하루코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쉰다.

“하지 마.”

샤워를 한 다음이라면 몰라도 종일 일하다 들어왔다. 게다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머리칼 냄새를 맡는 것은 싫다.

“왜?”


구마키는 여전히 여유로운 말투다. 거절하는 하루코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멀거니 서 있다.

“왜긴. 오늘 밤에는 일해야 한단 말이야.”

구마키는 낭만주의자다, 하고 하루코는 생각한다. 남녀 관계도 이 사람이 문제 삼으면 무척 낭만적인 것이 된다. 옆구리에 서류를 끼고 한 손에는 소주 칵테일 잔, 다른 손에는 전자계산기를 들고 하루코는 부엌으로 물러난다. 구마키가 들어와 같이 살면서 부엌이 하루코의 작업실이 됐다.

낭만주의자니까 삼십 대 후반의 나이에 수입이 없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이고, 낭만주의자라서 결혼하자는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작업실이지, 구석에 놓인 책상에는 컴퓨터며 서류며 신문이 뒤죽박죽 놓여 있어 일을 할 수가 없다. 하루코는 기름때 낀 후추 병이 놓인 식탁에서 일을 한다. 거치적거리니까 치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구마키가 치워주지 않는 테이블크로스 — 빨강과 하양 체크무늬 헝겊에 비닐 코팅이 된 싸구려다 — 가 덮인 식탁에서.

거실에서 뉴스 프로그램 소리가 들린다. 구마키가 볼륨을 올린 모양이다. 텔레비전을 좋아하지 않는 하루코는 그 소리 하나에 짜증이 나고, 그만한 일로 짜증을 내는 자신이 속이 좁은 것 같아 또 짜증이 난다.

내가 구마키를 엄청 좋아하나 봐, 하고 하루코는 생각한다. 34년 동안의 인생에서, 아마 가장 좋아하는 남자일 것이다. 물론 전에 사귄 남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고, 그 전에 사귄 남자도, 그때는 가장 좋아하는 남자였다.

이쿠코가 툭하면 — 그것도 아주 잘 안다는 표정으로 — 말하듯, 연애는 필연적으로 착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섯 살이나 아래 동생에게, 그런 걸 믿다니 하루코 언니 진짜 멋지다, 하는 말을 듣다못해 키스까지 당할 정도로 자신은 얼간이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코는 오랜만에 지난날을 떠올린다.

“하루코는 이상한 일에 의욕을 보인다니까.”

구마키 못지 않게 여유로운 아빠에게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다 위에 구멍이라도 뚫리는 거 아니냐?”

하루코 생각에 세 자매 중에서는 자신이 가장 상식적이다. 그것은 아주 멋진 일은 아니어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이상한 일에 의욕을 보인다’는 듯이 받아들여졌다.

화목한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도 행복했다. 그러나 한편 하루코는 집을 하루 빨리 나가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것도 절반은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현지에서 채용되어 직장이 결정되고, 귀국하자 아파트를 구했다. 3년 후에는 다른 — 역시 미국계 —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있어 전직을 기회로 지금 맨션을 구입했다. 언니 아사코는 스물아홉 살에 결혼할 때까지 줄곧 집에서 살았다. 하루코로서는 상상도 못할 선택이었다.

2번가 집에서 나온 지 12년이 되었다. 그 집에는 뭔지 모를 묘한 우아함이 있었다. 경제적인 풍요로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우아함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하루코 언니는 좋은 사람이야.”

좀 별난 동생은 좀 별난 식으로 위로해주곤 했다.

하루코는 고개를 내젓고는 서류를 내려다본다. 영어와 숫자와 그래프로만 구성된, 50페이지에 달하는 종이 다발이다. 

싸늘해진 소주 칵테일을 마신다. 빨강과 하양 테이블크로스, 저녁을 먹고 난 프라이팬과 그릇이 그대로 담겨 있는 싱크대, 환풍기,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책상. 발톱에 바른 페디큐어는 반이나 벗겨졌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

하루코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가, 하지만, 하고 생각하면서 씩 미소 짓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할 일이 있고, 살라미 껍질을 벗겨주는 남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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