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남은 것은 빚 독촉뿐이었다.

<이제는 나와 화해하고 싶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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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받아!”

어머니가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뭔데요”
“반지랑 팔찌 팔았어.”

무심한 듯 말하는 어머니의 표정 때문에 나는 더 비참했다. 어머니는 30대 초반부터 일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잦은 외도로 풍비박산 나기 일보 직전의 우리 집을 어머니는 온몸으로 지켜냈다.

태풍 매미보다 더 무시무시한 삶의 폭풍을 어린 자녀 셋을 둔 삼십 대 초반의 여인네가 홀로 감당해낸 것이었다. 봉제공장에서 삼십 년을 일해온 어머니는 그 성실함의 대가로 받은 근속기념 금반지와 팔찌를 빚 독촉에 시달려 얼굴이 검게 타들어가는 아들을 위해 팔아오신 것이다.

그 금쪽같은 보물을 처분했다는 것은 어머니의 인생 전체를 팔아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춘과 회한, 인생의 질곡이 옹이처럼 알알이 박혀 있던 어머니의 인생이 그렇게 속절없이 떠나가 버린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못난 아들이었다. 금목걸이는 못 해드릴망정 삼십 년 동안 수고한 삶의 징표마저 하루아침에 날려버리게 만든.

팔아버린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나는 이미 어머니가 평생 허리가 휘게 일해서 마련한 집도 홀랑 해치웠다. 그런 내가 어머니의 금반지와 금팔찌까지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듯 삶의 검은 바다에 던져 버린 것이다. 비참하고 허탈했다. 떨리는 손으로 돈 봉투를 건네받은 나는 차마 죄송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송구함, 찢어질 대로 찢어진 자존심, 식을 줄 모르는 화산처럼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도저히 낯을 들 수가 없었다.

30대의 젊은 호기로 시작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봄날 처마 끝 고드름처럼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솜털 보송보송한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오던 일이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힘을 모아 문화 사업을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영화를 보려던 것도 아니었다. 대박을 터트려서 팔자를 고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미련할 정도로 순수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무모하고 무지했다.

나는 몇 년을 그렇게 앞만 보며 정말 지독하게 일만 했다. 열정이라면 열정이고 과욕이라면 과욕이었다. 그래도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을 속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어머니가 내민 돈 봉투 앞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 알량한 떳떳함마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며칠 뒤가 설날이었다. 어머니가 패물을 팔아서 마련해 주신 돈으로 약소하나마 선물을 사서 집으로 가는 회사 식구들과 소속 연예인들의 손에 들려 보내고 나니 적막한 회사 숙소에 어머니와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명절에는 원래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데, 나에게 별 의미도 없는 설을 보내려니 마음이 더 뒤숭숭했다. 인생살이가 안 풀려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안 풀리나 싶어서 기가 막혔다.

그때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식당으로 들어서던 나는 그만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전기랑 가스가 안 되네. 뭔 사고가 났나?”

어머니는 급한 대로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누룽지를 끓여 놓고 무심히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고는 뭔 사고! 끊긴 거지!”

나는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 소리 없는 발악이었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입안이 깔깔해서 누룽지조차 넘기기가 힘들었다. 썰렁한 냉기가 도는 식당에는 적막함이 가득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처참하고 또 황망했다.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왔다는 생각에 더 처절한 슬픔을 느꼈다. 진심과 열정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그렇게 열심히 뛴 결과가 고작 빚쟁이들의 독촉전화와 누룽지 한 그릇뿐이라니, 이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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