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용서는 개나 줘버려!

<이제는 나와 화해하고 싶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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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다시 명상이었다. 걷는 것을 통해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졌다. 이제는 사람과 화해하고 싶다는 강렬

한 소원이 생겼다. 처음 돈에 대한 명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엉클어진 관계와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기로 했다.

방법은 비슷했다. 편안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호흡을 조절한다. 평화롭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감성도 정리한다. 그리고 미리 작성해놓은 명상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거친 파도처럼 내 삶을 파괴하고 헤어나기 힘든 아픔의 수렁에 저 자신을 밀어 넣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모든 현상이 나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내 잠재의식 속에 있던 사람과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과 선입견, 편견과 잘못된 믿음이 인생의 거울에 비쳤을 뿐입니다. 이런 저 자신에게, 또 나를 아프게 한 이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거기까지 읽어가다가 나는 도저히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회한과 참회의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너무 강해서 명상을 계속했다가는 내 머리통이 지구 밖으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날은 결국 그 자리에서 명상을 멈췄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시 명상을 시도했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마음을 다잡고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풀 건 풀어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힘들어도 다시 시작해야만 했으니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용서를 청합니…….”
“에잇, 용서는 개나 줘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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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나도 깜짝 놀랐다. 그냥 번개 치듯이 자동적으로 발사된 외마디 비명! 그것이 사실은 진짜 내 마음이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 나는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일 뿐인데. 가해자들은 목에 힘주고 대명천지에 떵떵거리고 사는데 내가 무슨 천하의 대역죄를 지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며칠을 시도해보고 나서 내가 얻은 결론이었다. 용서는 개나 주라는……. 그때 깨달았다. 용서는 준비를 마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어설픈 용서는 더 큰 분노와 화를 자초한다는 것을.

돈을 명상할 때 했던 방식은 인간관계에 대한 명상에서는 완전히 먹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돈하고는 그렇게 복잡한 관계나 감정으로 얽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빚쟁이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적으로는 무척 단순했으니까. 그런데 사람은 달랐다. 매우 다양하고 혼잡한 감정의 선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래서 쉽사리 용서의 시를 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나 갈등, 상처, 아픔들을 조화롭게 처리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일은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어도 감정은 그렇지가 않아서 사람과의 얽힘은 쉽게 풀리지가 않는다.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했다. 명상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막막하고 답답했다.

그러던 차에 숙소를 용산에서 다시 흑석동으로 옮겼다. 강남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사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어머니가 잠깐 동생 집에 가 계셨는데 다시 오시게 되면서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만큼 형편이 나아진 것이다. 용산 오피스텔을 정리하면서 요구르트를 배달해주시던 아주머니에게 이사 소식을 전했다. 요구르트를 그만 넣으시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참 좋은 분이 이사 가신다니 너무 아쉬워요. 거기서 좋은 사람 많이 만나세요.”

아주머니의 웃는 모습을 뒤로하고 돌아선 뒤에도 그 한마디가 계속 내 귀에 맴돌았다.

“이사 가시면 좋은 사람 많이 만나세요.”

삶의 깨달음은 작고 사소한 경험에서 온다. 그 아주머니의 말은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내가 해야 할 명상의 핵심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에게는 좋은 사람을 더 많이 끌어오는 것이 중요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씨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초대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정말 원하는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했다. 나를 속이고 배신하고 아프게 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대신 나에게 정말 도움을 주고 나의 성장에 밑거름이 될 상생의 인연을 구했다.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며 끝까지 배려해줄 선량하고 바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정말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의 성향과 면면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한 가지 깨닫게 된 사실은 안 좋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열망이 훨씬 크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회피하는 것보다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몇 배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과 ‘관계’에 대한 명상을 근본적으로 채워준 소중한 자각이었다. 덕분에 나는 형식과 순서까지 확 바꿔서 새로운 방식의 명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일단 몸을 풀었다. 명상을 하기 위해 곧바로 자리에 앉기보다는 먼저 간단한 스트레칭과 요가동작으로 몸을 이완했다. 그렇게 하면 훨씬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몸에 스며들고 쌓인다. 사람과 관계된 감정은 매우 강렬해서 어떤 느낌이 든 우리 몸 구석구석에 녹아든다. 그래서 몸을 먼저 푸는 것이 먼저다. 몸을 푸는 것은 뼈와 근육, 세포들이 기억하고 있는 감정의 응어리를 털어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몸을 풀고 자리에 앉아 호흡을 조절한 다음 잔잔한 음악을 들었다. 한동안 그렇게 편안하게 있다가 나에게 도움을 주고 믿어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을 함께한 이들을 생각했다. 그랬더니 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격려와 지지, 따뜻한 응원을 보내준 고마운 사람들, 존경하는 분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던 직원들과 가족들, 말없이 넉넉한 눈웃음을 보내주었던 선배들, 파이팅을 외쳐주던 후배들, 그리고 나를 믿고 투자해줬던 사람들이 마음에 그려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내가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공격당한 것은 오로지 나뿐이라고, 나는 사기당하고 이용당한 피해자였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는 사실을 절절히 느꼈다. 한참을 울고 나서는 절을 했다. 방석도 없이 그냥 이불 몇 개를 펼쳐놓고 정성스럽게.

절 수행은 종교를 떠나 심신에 아주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그것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미 증명해낸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했던 절은 수행이나 명상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잊고 지냈던 분들에 대한 감사의 큰절이었다. 내 영혼을 다해 그들을 향해 섬김을 표현한 의식이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며 입으로는 끊임없이 ‘감사합니다’를 되뇌었다. 절을 하는 동안 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날 밤을 소중하고 고마운 인연들에게 절을 올리며 온몸을 땀방울로 흠뻑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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