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책상 서랍 속의 타자기와 회전목마에 관하여>
생각해보니 두세 해 전에 독서에 관한 자기계발서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한 작가가 자기 책 속에 10년 치 인문 고전 목록을 제시한 걸 보고 식겁한 적이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말 그대로 ‘격분’했다. 그 10년 치 인문 고전 목록을 보니, 나름대로는 이십 수년 동안 열심히 책을 읽어온 나도 안 읽은 책이 절반이 넘는다! 이런, 인생 헛살았네.
더 놀라운 건 1년 차 추천 도서에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군사학 논고》며 유향의 《전국책》, 태공망과 황석공의 《육도삼략》 같은 책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20년 훨씬 넘은 독서 경력이 트럭에 깔린 애호박 신세가 된 순간이었다.
1년 차 독서 초보들이 《군사학 논고》를 읽고 어디에 쓰라는 걸까? 《전국책》은? 한 번 웃자고 농담한 것이 아니라면, 이 살벌한 자본주의 생존 전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뛰어난 책략가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일까? 역시 사는 건 전쟁이지.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거야, 하는 자괴감이 온몸과 마음을 강타하였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니다. 이런 추천 목록은 순진한 독자들에게 무시무시한 고전 독서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주범이다. 독자들을 무거운 고전의 짐을 짊어진 수동적인 낙타처럼 만들어버리는 행태이다. 혹은 유명한 고전을 읽었다는 지적 허영심만을 뱃속 가득 채우기 위해서이거나.
나는 고전에 대한 이런 식의 맹목적 우상숭배를 반대한다. 우리가 숭배해 마땅한 고전 같은 건 없다. 또 독서인 혹은 교양인 행세를 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 목록 같은 것도 없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적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책, 이 둘 중 하나다.”
고전 독서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 자신이 ‘지금 현재’ 상황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개인적인 관심과 문제의식, 나아가 당대가 제기하는 문제와 대결하기 위한 사유의 연장에서 자신에게 필요할 때 찾아 읽어야 한다. 취향이 너무나 고전적이라 고전이 자신의 영혼에 딱 맞는 옷이라면 고전만 찾아 읽어도 된다. 그게 아니라면, 결코 고전이라는 권위나 고전 목록에 휘둘릴 이유가 없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을 완성한 데이비드 흄은 결코 고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로크와 버클리 등 당시 영국 철학계에 선풍을 몰고 온 새로운 철학을 통해 자신의 문제의식과 사유를 치열하게 가다듬었고, 그 결과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서양 철학사를 뒤흔든 획기적인 저서들을 내놓을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감히 고전무용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전이건 아니건 한 권의 책 자체가 유용하거나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걸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100권이건 1천 권이건, 한 생이 죽기 전에 꼭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고전이라는 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전이라는 타이틀과 고전 독서의 유행을 좇기보다 자기 자신의 관심과 고민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먼저 살피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 지금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들, 알고 싶은 것들, 즐기고 싶은 것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독서로 즐거움을 얻고자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존재로 ‘변화’하기를 원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야말로 모든 독서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독서가 주는 순수한 기쁨과 재미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이 자기 자신과 삶,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인식의 쾌락과 연결될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얻는다. 독서에서 재미와 인식은 분리 불가능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나는 어디까지나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책에서, 나의 사고와 문제의식에 필요한 관점과 인식을 발견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만일 당신이 한 권의 책에서 자신의 실존적인 삶과 관련된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책을 ‘해석’하는 것보다 그 책에서 당신이 무슨 ‘고민’을 발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작가의 고민과 작품의 고민, 그리고 당신이 책 속에서 발견한 고민들을 연결시키며 깊이 생각해보라. 즉 해석하지 말고 고민을 발견하라. 그러면 한 권의 책은 당신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어올 것이며, 색다른 전율과 기쁨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