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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ug 01. 2016

00. <제갈량처럼 앞서가라> 연재 예고

<제갈량처럼 앞서가라>

지혜의 신 제갈량이 태어나던 때

   
죽은 지 17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대를 초월하고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사람들로부터 지혜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제갈량은 181년에 태어나서 234년에 죽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 말기였다. 한고조 유방은 역사상 첫 평민 출신 황제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운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을 합쳐 총 400년 동안 유지됐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긴 왕조에 해당한다. 그러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환제와 영제 등의 무능하고 부패한 황제가 잇달아 등장한 가운데 환관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면서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다 제갈량이 4살 되던 해인 184년 마침내 대규모의 ‘황건적의 난’이 폭발하였고, 중국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후 사마염이 사상 세 번째 통일을 이루기까지 약 100년 동안 혼란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를 통상 삼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버금할 정도로 전례 없이 혼란스런 시기였다.
     
당시 뛰어난 지략을 지닌 문사와 출중한 능력을 지닌 무사들이 각지에 할거한 군웅 곁으로 몰려들었다. 위・촉・오로 상징되는 삼국의 정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조조와 유비, 손권 등은 바로 이런 인재들을 적소에 배치해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치도(治道)와 치술(治術)을 비교 분석하며 삼국시대를 파악하고 있는 이유다. 치도와 치술은 현대의 리더십 이론에 적용하면 전략(목적)과 전술(방법)에 해당한다.
    

 
2천년 역사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제갈량의 명성
   
삼국시대 인물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 제갈량처럼 숭배된 인물은 거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수많은 당대의 영웅들이 뜬구름처럼 사라져버린 반면에 제갈량의 명성은 왜 2천년이 다 되도록 지워지지 않고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것인가?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최적의 파트너와 함께 평생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삼고초려를 한 유비와 융중의 초가집에서 만난 뒤부터 평생 유비 조직의 2인자로 활약했다. 유비 생전에도 마찬가지지만, 유비가 죽고난 뒤 촉한에서는 사실상의 1인자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신을 발탁하고 자신을 알아준 최상이자 최적의 파트너였던 유비와의 인간적 신의를 평생동안 지켰다. 때문에 유비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조직에 자신의 인간적 도리를 다해 충성했다.
     
두 번째 이유는 제갈량이 2인자로서 언제나 많은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조직을 잘 관리했다는 점이다. 제갈량은 한 사람의 식견은 유한할 수밖에 없어, 여러 사람의 계책을 널리 받아들여야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갈량은 말로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은 것이 아니라,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반드시 이를 실행에 옮겼다. 유비가 한중을 정벌할 때 군대를 보낼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다, 양홍의 의견을 받아들여 급히 지원병을 파견했다. 유선이 보위에 올랐을 때는 등지의 건의를 좇아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회복했다. 남방 정벌에 나섰을 때는 마속의 심리전을 채택해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는 자신과 상반되는 부하의 주장을 과감히 받아들일 줄 알았다. [여참군연속교(與參軍掾屬敎)]를 하달해 자신과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던 동화를 크게 칭송하며 모두 그를 본받도록 한 게 그 증거다. 그가 추진한 일이 대부분 성공을 거둔 근본배경이다.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부지런한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제갈량은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고, 밤에는 모두 잠이 든 후 잠자리에 들면서 각종 문서를 직접 처리했다. 민생과 관련된 사안은 더욱 자세히 살폈다. 그와 관련된 ‘제갈정(諸葛井)’과 ‘공명천(孔明泉)’ 등의 유적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제갈량이 신격화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관우도 신격화되기는 했으나 이는 정치적인 고려에 따른 것으로, 제갈량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네 번째 이유는 제갈량의 근검절약하며 청렴한 면모다. 그는 촉한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온몸을 바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면서도 이를 이유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살아 있을 때나 죽으면서도 청렴을 강조했음은 물론 결정적으로 구석(九錫)을 받아 왕이 될 것을 권했을 때 이를 단호히 거절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그는 이엄에게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귀하와 나는 오랜 지기로 서로 잘 알고 있소. 나는 본래 동방의 이름 없는 서생일 뿐이나, 외람되이 선제의 중용을 얻어 감당하기 힘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수많은 봉록과 상까지 하사받았소. 지금 적을 토벌하는 대업을 완수하지 못해 선제의 은혜를 갚지 못한 상황에서, 귀하가 나를 춘추시대의 패자인 제환공과 진문공에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도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오. 위나라를 멸한 뒤 천자를 다시 낙양으로 모신 뒤라면 ‘구석’이 아닌 ‘십석’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제갈량은 사사로운 이익을 멀리한 채 오로지 최적의 파트너와 함께 의로운 명분과 신의를 위해 평생 인간적 도리를 다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갈량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갈량이 융중의 초가집에서 ‘천하삼분지계의 대책’을 제시한 것은 겨우 27세 때의 일이다. 청렴한 선비의 피가 흐르던 제갈량은 황건적의 난이 휩쓸고 있던 세상을 바라보며 어릴 때부터 천하를 평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꿈을 키워나갔다. 때문에 당대의 인재와 명사들과 교류하며 시대를 통찰하기 위한 공부와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가 오자 세상으로 나가 삼국 정립의 기초를 만들고 결국 촉한을 건국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지금도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갈량을 지혜의 신으로 모시며 추앙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도 삼국시대 수많은 영웅들 속에서 제갈량의 명성은 유독 두드러진다. 이 책에서는 「삼국연의」를 통해 포장된 제갈량의 역사 속 진짜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했다. 독자들은 결국 인간적 도리를 다하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갔던 제갈량의 참모습을 발견해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 l 신동준

학오(學吾) 신동준(申東埈)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연구가이자 역사문화 평론가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는 독자들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전을 배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에서 10여 년 간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에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이후 일본의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그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동양 3국의 역사문화와 정치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월간조선》, 《주간동아》, 《주간경향》, 《이코노믹리뷰》 등 다양한 매체에 꾸준히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전을 배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에서 10여 년 간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에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이후 일본의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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