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
어른들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1970년대만 해도 여자가 대학교육 받고 취직하는 게 드문 일이었다고, ‘평생직장’을 다니다 퇴직하는 게 축복이라고, 회사는 전쟁터지만 사회는 지옥이라고. 지상파 방송사의 회계부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하면 다들 그렇게 안정적인 직장에 어떻게 들어갔냐며 치켜세웠다. 철밥통이니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이제 결혼하고 애만 낳으면 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회사에서 사원-과장-부장-국장-임원의 길을 가고 싶지 않다고 결정한 순간 내게 남은 선택은 별로 없었다. 지상파 방송사는 이직이 잦은 직장은 아니다. 일반 회사와 업무가 비슷하지도 않고 오랜 세월 쌓인 특수성이 강하다. 특히 경영 분야는 이직할 때 쉽게 경력이 인정되기 어렵다. 사실 이직의 사례를 찾기도 힘들다. 지금까지 쌓인 연차와 연봉을 모두 포기하고 새로운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가서 비슷한 일을 하는 현실을 상상해보면 오히려 현재가 더 낫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승진도 이직도 새로운 입사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전혀 다른 생각이 튀어나왔다.
아예 다른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그 공부가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라면?
보쌈과 나이
회사에는 업무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다.
회사에서 내 업무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부서원의 생일을 챙기는 일이었다. 매번 케이크에 촛불 붙이고 노래만 부르자니 별로라서 뭘 할까 고민이 많았다. 의외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 보쌈이었다. 평소에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보쌈을 사람들이 왜 좋아했을까 싶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생각보다 보쌈은 점심 메뉴로는 인기가 없다. 야식으로 치면 치킨이나 족발에 밀린다. 하지만 막상 시켜보면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슬슬 배가 고파지는 4시 반쯤 회의실에 모여 따끈따끈한 수육을 시원하고 달달한 김치와 함께 먹으면 다들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케이크 대신 보쌈 위에 초를 꽂으려면 나이를 확인해야 했다. 부장님 이상은 묻지 않고 큰 초 두세 개만, 40대 이상은 원래 나이보다 한두 개 실수로 빼는 게 관계 유지에 좋았다.
그렇게 매달 누군가의 생일이 돌아왔다. 보쌈 맛은 변함없는데 지겨워졌다. 연차가 쌓여도 일이 크게 바뀌지 않으니 처리 속도만 빨라졌다. 야근도 훨씬 줄었고 예전처럼 많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길어진 점심시간과 넉넉한 간식 덕분에 살이 쪘다. 배는 부르지만 머리는 멍했고 가슴은 허전했다. 업무는 여전히 나이와 연차만을 반영하여 일렬로 줄 세운 후 배정되었다. 부서 이동은 꿈에서나 가능했고 일상은 구름이 잔뜩 낀 날씨 같았다.
하루하루 꾸역꾸역 알약을 넘기듯 살다가 정시 퇴근을 할 수 있는 날에는 각종 모임으로 가득 밤 시간을 채웠다. 피곤에 못 이겨 쓰러지듯 잠이 들면 그나마 괜찮았다. 월급날 찍힌 통장의 숫자가 의미 없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