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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09. 2018

02. 자살 예고 편지

<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



편지(便紙)를 일본에서는 ‘테가미(手紙)’라고 한다. 손(手)과 종이(紙)가 합쳐져 편지가 된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는 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편지에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휴대전화, 이메일의 전성시대인 요즘에도 역시 중요한 일은 편지여야 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래전 일본의 한 초등학생이 손으로 종이에 쓴 편지가 일본열도를 뒤흔든 적이 있었다. 아이는 ‘이지메(집단 괴롭힘)’의 피해를 호소하며 ‘자살을 예고하는 편지’를 문부과학성 대신(장관) 앞으로 보냈다. 아이는 편지를 보내며 이 말을 덧붙였다.


편지로밖에 전할 수 없는 마음이 있고, 편지이기 때문에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등 인생의 엇갈린 희비가 모두 편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초등학생의 수제품인 ‘자살 예고’ 편지는 일본 국민 모두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지메가 원인인 자살증명서

문부과학성 대신 님, 저는 이지메의 원인으로 11월 11일 토요일에 자살할 것을 증명합니다. 이 편지를 ① 이지메를 한 사람들 ② 클래스의 모두 ③ 담임선생 ④ 교장 선생 ⑤ 교육위원회 ⑥ 이지메를 한 사람들의 보호자 ⑦ 저의 양친에게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매스컴의 여러분께도 전부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편지를 쓴 이유는 살아가기가 싫어서입니다. 이지메를 한 사람들은 아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선생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선생님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도 말했지만 ‘참으라’는 말씀밖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부모님과 선생님은 “너의 성격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11월 8일(수요일)까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자살증명서’대로 자살을 하겠습니다. 자살 장소는 학교입니다.

이러한 편지를 받고 그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는 조속한문제 해결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 초등학생에게 ‘죽지 말고 살아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뜻에서였다.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그 당시 계속되는 ‘이지메 자살’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실제로 오사카 중학교 1학년이던 여학생이 “나는 자살합니다. 목걸이는 언니에게 주세요”라는 메모를 남기고 아파트 8층에서 뛰어내려 숨졌고, 기타큐슈에서는 이지메 문제의 처리 과정에서 추궁을 받던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이 자살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편지를 보낸 초등학생은 자살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부과학성은 이 편지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자살 예고 편지는 일본의 전국 각지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일본의 학교·가정·교육위원회 등은 긴밀한 모임을 갖고, 이지메 방지 대책을 세우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하지만 학교 측의 미흡한 대책이 매스컴의 단골 메뉴였다. ‘집단 폭력’, ‘바지를 벗기는 행동’ 등 음습한 행위가 되풀이되고 있었지만, 담임선생은 대책을 수립하기는커녕 눈치도 채지 못했다.

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국어·수학 등의 지식을 가르쳐서 학력 향상을 도모하는 것으로 교사의 역할이 끝난 것일까? 아니다. 그래서 ‘교사도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간 의식을 배양하는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국 교육위원회에서도 ‘이지메 조기 발견·지도 수칙’ 등의 대응 매뉴얼을 각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배포하도록 했다. 이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러브레터>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것>이라는 영화가 한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이지메, 청소년 범죄, 폭력, 원조 교제 등 십 대 아이들이 사춘기에 치르게 되는 열병을 시대 흐름에 맞게 묘사했다. 정확히는 이지메를 당하는 청소년이나 이지메를 가하는 아이가 함께 겪는 일그러진고통의 파편들을 버무렸다. 문제는 일본의 어른들이 이지메에 대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 나이가 어떤 시절인가를 어른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 츠지 히토나리는 “편지를 쓰는 데는 힘이 필요하다. 편지를 쓰면 희망이 생겨나고 생명력이 깃든다”고 했다. 자살 예고편지를 정성스럽게 쓴 초등학생에게는 분명 힘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생명력이 깃들어 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힘을 ‘죽으려는 용기보다는 살아가는 용기’를 북돋우는 데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편지는 우리에게 좀 더 폭넓은 삶을 허락하는 힘이 있다. 동기를 드러내어 이해가 깊어지게 한다.(중략) 편지 없는 세상은 분명 산소 없는 세상일 테니.”

사이먼 가필드(Simon Garfield)의 편지 이야기다. 편지는 이렇게 깊이가 있고 힘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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