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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민감’을 탄압하는 사회

<평온의 기술>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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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민감하구나!” 민감한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무척 억울해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은 전적으로 민감한 성격 탓으로 돌려지니 어찌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점잖은 편이다.

“너는 매사에 어쩜 그렇게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니?” 이건 걱정이 아니라 아예 욕이나 다를 바 없다. 전체 인구의 20퍼센트가량이 민감한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는데, 적지 않은 규모임에도 민감한 사람들은 2퍼센트의 극소수자나 되는 것처럼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살아가야 하니 이건 영 정의롭지도 않다. 아니 2퍼센트인들 그래서야 쓰겠는가.

사람들은 민감한 사람을 내향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지만, 민감한 사람 중 30퍼센트가 외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민감하면서도 외향적인 사람은 성장해온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 익숙한 것일 뿐, 혼자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점에서 다른 외향적인 사람들과는 구분된다.

민감하면서도 외향적인 사람은 사회적 탄압의 대상은 아니다. 이는 민감성에 대한 사회적 탄압이 사실상 내향성에 대한 탄압이라는 걸 말해준다. 심리치료사인 일자 샌드(Ilse Sand)에 따르면, 내담자들에게 그들이 내향적이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혼자 있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걸요”라고 하면서 부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외향성이 강한 미국에서도 내향적인 사람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 혹은 2분의 1가량이나 된다. 두세 명 중 한 명은 내향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외향성을 찬양하고 내향성을 탄압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특히 행동, 속도, 경쟁, 추진력 등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회에선 “너는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어울려야 해!” 증후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향성은 곧 ‘루저’의 자질로 간주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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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샌드는 “지금은 내향적이라는 말이 모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인 것 같다”며 “내향적이라는 표현은 말을 걸기 어렵고, 남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사이버공간에 빠져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물론 한국도 미국 못지않게 민감을 탄압하고 둔감을 예찬하는 사회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다르지만, 우리에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와 1980년대만 해도 인권에 민감했다간 감옥에 끌려가기 십상이었던지라 둔감해야만 나와 가족의 안녕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세상은 지나갔지만, 그때 집단적으로 형성된 둔감의 습속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적 삶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물론 일상적 삶에서 둔감은 바람직한 면도 있다. 너무 민감해서 자주 상처받는 사람이 좀 많은가. 일본의 의사이자 작가인 와타나베 준이치(渡邊淳)一가 『둔감력』이라는 책에서 요즘 같은 세상에서 살려면 좀 둔해져야 한다며 ‘둔감력(鈍感力)’의 장점을 역설한 것도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한국의 이시형도 『둔하게 삽시다』에서 둔하게 사는 삶의 장점을 역설한다.

둘 다 좋은 책이지만, 모두가 다 둔하게 사는 세상의 문제는 없을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세상엔 민감해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과 둔감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전자를 향해서만 둔감해지라고 권하는 걸까? 후자에게 민감해지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전자를 향해서만 해법을 제시하다 보면 민감한 사람은 내내 둔감을 훈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세상은 영영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좋은가?

지금 한국 정치가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인들의 후안무치가 아닌가. 그런데 기질적으로 비판에 민감하고 후안무치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아예 정치판에 뛰어들 수도 없다는 이야기이니, 이러고서야 정치가 어찌 바뀔 수 있겠는가. 아니 정치인만 탓할 일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 걸쳐서 우리는 ‘강한 멘탈’과 ‘강한 정신 근육’을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키워가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누가 덜 민감한가 하는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게 거스를 수 없는 인간 세계의 법칙이라면 내키지 않아도 따라야 하겠지만, 그건 결코 그렇지 않다. 정치인과 관료가 시민의 요구와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이 세계적인 ‘시위 공화국’이 된 것은 정치인과 관료가 시민의 요구와 비판을 둔감력으로 대처하는 것을 기본자세로 삼고 있다가 언론 보도가 될 정도의 집단적 시위에 나설 때에 다소 민감한 척하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열풍은 크게는 약자를 탄압하고 착취하는 인권유린에 대한 저항이지만, 작게는 바로 그런 풍토가 조성해온 ‘둔감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남성일지라도 일상적 삶에서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소지가 다분한 언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주변에서 “예민해졌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 말을 들을까 봐 침묵하는 남자도 많다. 교수의 성추행에 저항하지 못했던 어느 여학생은 졸업 후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제가 너무 유난이고 예민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가해자 측은 피해자의 ‘민감’을 방어 논리로 활용하기도 한다. 성폭력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어느 대학교수의 변호인은 재판부에 보낸 의견서에서 피해자에 대해 “민감한 성격”, “피해 의식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하다”며 피해자 탓을 했다. 게다가 피해자는 가해자를 옹호하는 주변 사람들부터 왜 피고인을 용서하지 않느냐는 비난까지 듣고 있다니, 이 정도면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니고 무엇이랴.

민감을 탄압하는 둔감한 세상에선 일상의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 아주 작은 공격)’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무조건 ‘프로불편러’로 찍히기 십상이다. 마이크로어그레션은 하나하나는 너무 작아 티가 나지 않아 쌓이고 나서야 보이는 미세먼지 같은 차별이라고 해서 국내에선 ‘먼지차별’이라고도 불린다. 일상에서 여성에 대해 흔히 저질러지는 ‘먼지차별’은 다음과 같은 발언들이다.

“여자는 능력 없으면 그냥 취집(취업+시집)가.”
“넌 살만 빼면 남자들한테 인기 많을 거야.”
“직업이 교사면 나중에 시집 잘 가겠네.”
“안 그렇게 생겼는데 담배를 피워?”
“얼굴 예쁘면 3개월, 요리 잘하면 평생 사랑받아.”

민감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다 바람직하거나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감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에 비해 더 창의적이고, 세심하며, 협력적이고, 인과관계를 잘 파악하는 장점이 있지만,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인지하다 보니 지나친 자극을 받을 수 있으며, 남들의 반응에 무척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 오래전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이 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극도의 민감성은 인격을 풍요롭게 만든다. 단지 비정상적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만 이러한 장점이 매우 심각한 단점으로 바뀐다. 그것은 민감한 사람들의 침착하고 신중한 성향이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도의 민감성을 본질적으로 병적인 성격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의 4분의 1을 병적으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감성을 병적으로 규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데엔 ‘질’보다는 ‘양’을 우대하는 사회 풍토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친구가 많으냐 적으냐만 따질 뿐, 어떤 깊이로 친구를 사귀느냐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양적인 발상이 아닌가. 이는 매사에 질 위주의 사고방식과 기질을 갖고 있는 민감한 사람에겐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내향성과 민감성을 탄압하는 사회의 병폐를 바꿔나가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하되, 우선 당장 개인 수준에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우선 자신의 비교 우위를 확실하게 아는 게 좋을 것 같다. 일자 샌드는 “자기 자신을 양으로 측정하지 않고 질로 측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며 “당신은 남들처럼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는 못하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일을 해낼 수 있고, 좁은 폭을 깊이로 상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무뎌지는 법을 연습해서 사회적 탄압을 피해가려고 시도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부의 탄압보다는 내면의 탄압이다. 계속 민감하게 살면서 사회적 탄압을 받더라도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처도 받지 않으면 된다. 스스로 주눅 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야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너무 유난스럽거나 예민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고, 화를 내거나 저항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민감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는 내가 아니라 사회’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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