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20년 전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책이 번역・출간되었을 때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샀다가 속으로 “앗, 속았구나!”라고 외친 적이 있다. 제목과는 별 관련이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찾자면 서문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양식(良識)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조차도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양적으론 아쉽긴 했지만, 질적으론 이 말로 충분했다. 아니 반가웠다. 나의 평소 지론과 잘 통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화를 낼 만한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는 건 좋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성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누구건 “혹 나에게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화를 낸다고 해서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달라질 것 같은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리처드 칼슨(Richard Carlson)은 바로 그 점을 염려한다.
“어떤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적대감을 품을 때 막상 고통을 받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분노를 끌어안고 다니는 사람도 나 자신이다. 어떤 사람을 바라보며 그가 오늘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와의 문제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갖게 된다. 그에 대해 계속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기 어려워진다.……주어진 시련을 저주로만 보지 않고, 성장과 관조의 기회로 삼는 것이 만족한 삶을 누리는 열쇠이다. 상대방을 죽어가는 사람 대하듯 한다는 개념은 이러한 변화를 만드는 유익한 방법이다.”
칼슨의 처방은 “좀 독하네!”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화를 유발한 사람을 죽어가는 사람 대하듯 하라니, 이 어찌 독한 생각이 아니랴. 나는 아직 그 경지에까지 이르진 못했지만, 앞서 에코가 시사한 해법은 늘 실천하고 있다.
그건 바로 상대방을 어리석게 보면서 경멸의 과정을 거쳐 동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웃으면서 화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난다. 물론 웃으면서 화낸다는 것은 비유일 뿐 정말 웃으면서 화를 내는 건 아니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할 말을 하는 여유 정도로 해석하면 무방하겠다. 이른바 ‘정신 승리’의 요소가 다분하지만, 나의 오랜 경험상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가끔 논쟁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다. 소통을 위한 논쟁은 가능한가? 박성창은 “논쟁이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기술로 변질되는 순간, 말은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며 “합리적 의사소통의 체계에서 말은 생산적이고 비폭력적인 갈등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로 기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날카로운 칼이 되어 상처를 입히고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논쟁에 임하는 사람들 중에 논쟁을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기술’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장강명의 소설 『댓글부대』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논리 싸움은 두 사람이 아주 좁은 화제를 가지고 붙을 때, 그것도 두 사람이 좀 양식 있는 사람들일 때에나 가능한 거예요. 인터넷 싸움은 정력과 멘탈로 하는 겁니다.” 옳은 말이긴 한데, 어디에서 벌어지는 말싸움이나 글 싸움이건, 싸움의 주체가 누구이건, 정력과 멘탈로 하지 않는 싸움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역사적으로 자기계발 전문가들이나 저명인사들이 논쟁의 어두운 면을 역설하고 있는 것도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은 논쟁을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기술’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우리는 반대하기 위해서만 토론을 배운다”며 “각자가 반박하며 반박을 받으니, 논쟁하는 성과는 진리를 잃어버리고 없애버리는 것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논쟁을 벌이거나 반박하고 있는 동안에는 상대를 이긴 것 같은 느낌도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과 없는 승리일 뿐이다. 상대의 호의는 절대로 얻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라고 말한다.
크리스 라반(Chris Ravan)은 논쟁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이론적인 투쟁의 눈부신 승리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호의를 얻을 것인가. 이 두 가지는 절대로 함께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1888~1955)는 논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논쟁을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방울뱀이나 지진을 피하듯이 논쟁을 피하라. 논쟁은 열이면 아홉이 결국 참가자가 자신의 의견에 대해 전보다 더 확신을 갖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사람은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 논쟁에서 지면 당연히 지는 것이고, 만약 이긴다고 해도 그 역시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일까? 자, 당신이 상대방의 허점을 찾아 그가 틀렸음을 입증해서 이겼다고 치자.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물론 당신이야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방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당신은 상대방이 열등감을 느끼게 했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는 당신의 승리에 분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언들은 사적인 인간관계에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이지, 공적인 주제로 공론장에서 벌이는 논쟁에까지 적용할 수는 없으며 적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과거에 그렇게 믿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나는 과거에 ‘논쟁 강박증’을 갖고 있었다. 그 누구건 나에 대해 비판을 하면 반드시 응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힘의 논리’에 따라, 격 또는 급을 따지면서 논쟁에 응하는 권위주의 문화에 대한 강한 혐오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은 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소심하다거나 과민하다거나 옹졸하다거나 쓸데없이 싸우길 좋아한다거나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버릇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따위의 말까지 들어야 했으니 나로선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내게 ‘논쟁 강박증’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성실 강박증’ 또는 ‘겸손 강박증’이었다. 그 누구의 말도 무시해서는 안 되며 나는 일일이 답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말이다. ‘의연’과 ‘둔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며, 둔감의 습관화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오만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잦은 사과를 했는데, 그것 역시 조금은 의도적인 면도 있었다. 독선과 오만을 예방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자기 폭로’다. 자신이 매우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걸 널리 알리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콤플렉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내겐 ‘독선과 오만’을 피하고 ‘성실과 겸손’을 실천해야 한다는 집착이 있었다.
물론 이젠 생각이 좀 바뀌었다. 남들의 오해에 대한 피곤함과 서운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침묵’의 장점을 기꺼이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나 주장, 또 나에 대한 매우 부당한 비판이라도, 내가 일일이 나서서 논박하지 않더라도 결국엔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늘 모든 경우에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또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생각엔 불완전하고 위험한 점도 있다. 그러나 악착같이 끝없는 논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다는 데엔 기꺼이 동의하게 되었다.
논쟁은 일상적 삶에서도 자주 이루어진다. 논쟁을 무작정 피하면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잃을 뿐만 아니라 사람 만나는 재미도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화내는 법’의 연장선상에서 ‘웃으면서 논쟁하는 법’을 실천하고 있다. 누군가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을 강하게 피력할 때 정색을 하고 반론을 펴면 상대방은 더욱 자기 의견을 고수하는 쪽으로 변하더라는 걸 수없이 경험한 끝에 찾은 해법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들으면서 속으로만 화를 내면 건강에 좋지 않다. 나는 그런 경우에 상대의 주장이 흥미롭다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생각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주장도 있던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식으로 제3자적 입장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들어본다. 내겐 이게 아주 재미있다. 내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방식의 논쟁이니까 말이다. 상대가 내 의도를 눈치 챌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피차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안전거리가 확보되어 있기에 기꺼이 응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