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용서하되 잊지 말자(Forgive without Forgetting).” 엄청난 인종차별이 저질러졌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가 백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는 흑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한 말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지만, 그런 정도의 용서도 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목사이자 노예폐지 운동가였던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1813~1887)는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을 수는 없다’는 말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며 “용서란 부도난 수표를 찢어 태워버린 뒤 다시는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형외과 의사 출신으로 ‘마음의 성형수술’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에 의해 성공학 전도사로 변신한 맥스웰 몰츠(Maxwell Maltz, 1889~1975)는 “용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잊혀질 때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에서 고름을 빼내고 그것을 치료해 흉터를 없앨 수 있는 메스가 된다”며 “이미 용서한 잘못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도 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용서, 정말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것은 어렵게 말해야 하는데, 너무도 쉽게 용서를 말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지식인이 피해자도 아니면서 피해자들을 향해 용서의 미덕이나 아름다움을 주장한다. 이른바 ‘용서 부추기기(forgiveness boosterism)’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태에 대해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용서처럼, 행위 자체는 드물면서 그토록 많이 쓰이는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용서가 중요하거나 필요한 일이 아니며, 무엇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처벌받으면 천운이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각자 자기 길을 가면 된다. 용서는 판타지다. 용서만큼, 가해자 입장의 고급 이데올로기도 없다. 나는 용서에 관한 환상을 깨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희진의 생각을 지지한다. 사실상 ‘책임은 힘없는 사람이 지고 용서는 힘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세상에서, 주로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 퍼부어지는 용서 예찬론은 뭔가 좀 이상하다. ‘용서 부추기기’에 앞장서는 사람들의 심리는 도대체 뭘까?
사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용서 대신 복수를 택해 ‘복수혈전(復讐血戰)’이 벌어진다고 생각해보라. 구경꾼이더라도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불안해진다. 즉, 제3자로선 사회적 안정과 평안을 위해 피해자가 용서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를 미화하는 것이다.
리처드 칼슨(Richard Carlson)의 책을 읽다가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는 말을 접하면서 속으로 “아름다운 사랑 좋아하시네!”라면서 코웃음을 쳤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려면 자기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주제넘게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가. 그런데 책을 더 읽어나가다가 접한, 아이를 납치당해 잃은 어느 어머니의 한마디는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때 내가 절망에 빠져 용서를 하지 않았다면 술과 마약으로 인생을 망쳤을 거예요.”
자신의 어린 딸을 칼로 찔러 죽인 10대 소녀를 용서하기로 결심한 다른 어머니의 말도 비슷하다.
“내가 그 아이를 용서하지 않으면 비통과 분노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았어요.”
그렇다. 바로 이게 문제다. 이런 경우가 꽤 많다.
1981년 전두환의 5공 정권 치하에서 필화 사건으로 극심한 고문을 받았던 소설가 한수산은 그 당시 보안사의 책임자였던 노태우가 1987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도저히 이런 나라에서 살기도 힘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며 한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떠났다. 후일 한수산은 노태우 등 신군부 일당에 대해 ‘용서’를 택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을 해봐야 용서한다’란 말이 있다. 나는 힘들게 힘들게 그들이 내 삶에 끼친 고통스런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돌아보니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도 안 변했지 않은가. 결국 저들은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다. 나는 나를 위해 그들을 용서했다.”
물론 이 경우의 용서는 진정한 용서는 아니다. 가해자가 반성도 하지 않고 용서도 빌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용서일 뿐이다. 그러나 내겐 남들이 박수치는 용서보다는 이런 용서가 감동적이다. 누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하는 용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용서, 이게 훨씬 더 인간적인 게 아닌가?
이런 용서가 현명하다는 데엔 의학적 근거도 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상대가 사과하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등의 조건이 있어야 용서하는 사람은 조기 사망 확률이 더 높았다. 우리는 상대가 사과할지를 통제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과를 받을 때까지 용서를 미룬다면 가해자의 손에 내 삶을 넘겨주는 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비교적 사소한 일의 경우, ‘나를 위한 용서’의 힘은 매우 크다. 누구건 일상적 삶에서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라고 배신감을 느끼는 일을 겪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짜증이 나고 화가 치미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은 사과도 없었고, 아니 어쩌면 자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 나는 나를 위해 그 사람을 용서하는 길을 택했다. 내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나쁜 놈’ 대신 ‘미련한 놈’으로 바꿔 부르자, 한결 마음이 나아졌다. 미워하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건 진정한 용서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용서는 판타지라는 말씀을 다시 드리고 싶다. 우리에게 가능한 용서는 ‘남을 위한 이타적 용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이기적 용서’다. 이렇게 해서 얻는 평온이 무작정 진정한 용서를 외침으로써 얻는 위장 평온보다 덜 위선적이거니와 수명도 오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