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의 월든>
시간의 풍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알다시피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하지만 사람은 사는 동안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지는지 알 수 없고 이것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 두 사람이 시간과 가속화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친한 친구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친구는 ‘삶을 찬양하라고. 너무도 소중하니까!’라고 쓰고는 이어 뇌종양이 더 커졌다고 했다. ‘마치 누가 커다란 고무지우개로 다 지워버린 것 같은 느낌이야. 이젠 내 이름도 쓰지 못한다니까. 내가 손으로 칼을 어떻게 잡는지 생각해봐. 이 메일을 작성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보람 있는 것은 숲을 산책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내는 거야.’
이 글을 읽고 우린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진정성이 절절히 묻어나는 친구의 말을 생각하니 절망과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경고하는 그 말에는 어떤 시간 전문가도 전달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었다.
‘당신의 시간이 당신의 인생이다! 현명하게 생각하라!’
이 말은 우리가 안식년에 고속도로변에 서 있는 낡은 나무간판에서 본 것인데 이후 우리의 좌우명이 되었다. 시간의 복지를 누린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만드는 일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시간을 들이는 사람은, 그로 인해 엄청난 만족을 맛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시간과 더불어 살며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이 오래도록 기억할, 그리고 다시 속도가 붙고 불안해질 때 당신에게 힘을 주는 운명의 시간이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머릿속에 담고 있을 때면 나는 가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조용히 앉아 있곤 한다. 손녀가 태어났을 때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그렇게 해서 새 생명이 태어난 며칠간 곁에서 거들면서 젊은 가족과 일상을 함께 보냈다. 때때로 한 시간 이상을 그냥 창가에 앉아 어린 손녀를 품에 안고 놀라운 생명의 경이로움을 맛보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지만 동시에 아주 느리기도 했다.
시간은 일회적이다. 이런 시간을 그렇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요즘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
시간의 복지란 일상 속에서 다양한 시간 활용의 형태를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계획되고 구조화된 시간이 있다. 이 동안 당신은 뭔가를 하며 성취해낸다. 그 외에 당신이 흘려보내거나 어슬렁거리거나 아니면 즐겁게 머무는 시간이 있다. 이런 것은 시간이 흘러넘친다는 느낌을 키워준다.
주목할 것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자연의 리듬이다. 당신이 아침형 인간인지 저녁형 인간인지, 여름에 활기찬지 아니면 겨울을 좋아하는지, 또 계획하기를 좋아하는지 혹은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행동하는지, 이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떤 유형을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리듬이 있기 마련이다. 지속적이 아니라면 최소한 어쩌다 한 번씩이라도 그 리듬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우리 인간에겐 끊임없이 의무만 다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공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여유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