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기억은 냉동된 식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by 더굿북

다다 구니카즈와는 일과 관련해서 처음 만났다. 아사코가 단기대학을 졸업하고 양주 회사에서 홍보 일을 할 때였다. 대규모 PR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구니카즈는 아사코보다 네 살이 많았으니까 당시에는 아직 젊었다. 값비싼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감도 없어 보이고 어수룩했다. 회의석상이나 광고 제작 현장에서 간간이 얼굴을 마주쳤고, 그러다 대화를 나누고 식사도 같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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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카즈를 처음 가족들에게 소개했던 날을 아사코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긴장했던 탓도 있겠지만, 부모가 이혼한 직후여서 집안이 어수선했던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동생들이,

“그날, 언니가 레드와인 한 병을 혼자서 다 비웠어”

하거나,

“엄마가 오랜만에 요크셔푸딩을 만들었지”

하거나,

“엄마가 형부에게 이것저것 물었더니 언니가 괴롭히지 말라고 막았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그때 이미 아빠는 집에서 나간 사람이었는데,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당당한 표정으로 거기에 있었다. 엄마도 아주 명랑하게, 여전히 아빠의 아내인 것처럼 음식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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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집은 맨션으로 재건축되었기 때문에 그날 가족끼리 먹은 식사가 ‘2번가 집’에서의 마지막이 되었다.

기억은 냉동된 식품 같은 것이라고 아사코는 생각한다. 오래되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냥 거기에 있다. 썩는 일도 성장하는 일도 없다.

집에 돌아와 차고에 차를 세운 아사코는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마음을 푹 놓았다. 집에 돌아왔네, 하고 생각한다. 자신과 구니카즈의 집에.

우편함에서 이쿠코가 보낸 우편물을 본 아사코는 싱긋 웃었다. 동생들을 만난 지가 한참 되었다.

같은 날, 이쿠코는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과거에 반년 정도 만났고, 그 관계가 끝난 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는 남자와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지만, 결국 그 약속은 연기해야 했다.

비니거맛 포테이토칩과 맥주와 단팥 도넛.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지만 이쿠코는 좋아하는 밤참을 한 손으로 먹으면서, 대체 왜 나는 이렇게 늘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게 되는 거지, 하고 생각한다. 한 손밖에 쓸 수 없는 것은 다른 한 손을 남자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오늘 밤 만나기로 한 ‘좋은 친구’인 남자도 아니고 최근에 사귀고 있는 이륜면허 남자도 아니고, 학생 시절의 친구인 미츠오였다.

이쿠코는 지금 자기 아파트에서 미츠오에게 손을 잡힌 채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보는 중이다. 미츠오는 단팥 도넛에는 손도 대지 않고, 한 손으로 맥주와 포테이토칩만 번갈아 먹으면서 ‘극장처럼 하자’ 하고는 굳이 불을 끈 방에서, 태평하게 영화에 집중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른 새벽의 전화였다. 미츠오가 아니라 미츠오의 여자 친구인 사토미가 건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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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새 얘기해보고 알았어.”

사토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분노보다는 결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미츠오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쿠코 넌가 봐.”

마지막에는 희미하게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생각해보면, 옛날부터 그랬는걸, 뭐. 이쿠코는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러고는 약간 훌쩍거렸다.

“지금 몇 시지?”

네 시, 하고 사토미는 대답했다. 이쿠코는 한숨이 나왔다. 방 안은 아직 밤처럼 어두웠다. 수화기를 쥔 손도 어깨도 시렸다. 그래서 이쿠코는 요점만 말했다.

“하지만 난, 미츠오 필요 없는데.”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건, 미츠오와 너의 문제잖아.”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평소대로 여섯 시에 일어나, 단팥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사토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자동응답 기능으로 돌려져 있었다.

오후에 미츠오가 직장에 나타나, 오늘 새벽 전화는 사토미가 오해해서 그런 거야, 하고 말했다. 이쿠코는 당연하지, 하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런데, 잭 니콜슨의 고뇌에 찬 얼굴을 보면서 이쿠코는 생각한다. 그런데, 아마 그때 나는, 직장 현관의 포인세티아 화분 옆에서 어떤 잘못을 한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방에서 미츠오와 영화를 보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게 이쿠코가 필요한 건 확실해.”

미츠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덧붙였다.

“내 인생에, 라는 뜻이지만. 이쿠코도 그렇고, 마츠다도 도키도 다 필요해.”

학생 시절의 친구 이름을 몇 명 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명 더 든다는 식으로,

“물론 사토미도”

하고 말했을 때, 이쿠코는 그만 웃고 말았다. 미츠오다운 변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쿠코는, 그런 미츠오를 유쾌하다고 생각했다. 유쾌하고 정상적이라고.

‘좋은 친구’ 관계에 있는 남자와 아사가야 역에서 만나기로 한 일곱 시에 이쿠코는 미츠오와 침대에 있었다. 사토미가 알면 세 번째라고 비난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세 번이 아니었다.

“사토미에게 보고하면 안 돼.”

이쿠코는 일단 그렇게 단단히 일렀지만, 미츠오는 심신이 건전한 사람이다 보니 알 수 없다.

미츠오는 이쿠코의 방에서 사토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아무튼 오늘 밤 안에 오해를 풀고 싶어.”

사토미가 야근 때문에 마지막 전철이나 탈 수 있다고 해서,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난 이런 거, 대수로운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영화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이쿠코는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토미나 다른 사람들은 아마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미츠오는 이쿠코의 얼굴을 보고는 히죽 웃고선 말했다.

“아마와 절대를 같이 쓰는 건 이상하지.”

지난번에는 샐린저였다. 그 전에는 아사코가 좋아하는 가게의 잎 홍차였고, 아이보리 세제였던 적도 있다. 그리고 오늘은 여성잡지였다. 여성잡지. 남편이 고른 ‘선물’은 남편 그 자체인 것처럼 어눌하고 자상하고, 그리고 나무랄 데가 없다.

아사코는 미소 짓지만, 동시에 정체 모를 슬픔에 가슴이 메인다. 자신이 남편을 괴롭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는데”

하고 말한다.

“어때, 그냥 선물인데.”

구니카즈는 그렇게 대답한다.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난 다음 날, 구니카즈는 종종 ‘선물’을 사들고 온다. 절대 비싼 것은 아니다. 꽃이나 조그맣고 예쁜 과자 같은 흔한 것도 아니다. 아사코에게만 통하는, 또는 자신만이 아는 아사코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이없다. 아사코가 샐린저를 좋아한다고 해서 사온 『아홉 가지 이야기』는 아사코의 책꽂이에 이미 있는 것이고, 게다가 늘 아사코가 읽는 잡지라면서 사온 여성잡지는 똑같은 것이 이미 식탁 위에 있다.

“벌써 샀는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도 구니카즈는 놀라지 않는다.

“뭐야, 그랬어”

하고 말할 뿐이다. 실망하게 했다고 생각했을 때, 죄책감이 원래 주인에게서 아사코에게 옮겨간다는 것을 남편이 아는지 모르는지 아사코는 모른다.

구니카즈는 기분이 좋았다.

“장모님은 잘 계셔?”

그렇게 묻고는,

“모처럼 만났는데 저녁이라도 먹고 오지 그랬어”

하고 말한다. 저녁과 목욕을 끝내고, 둘이서 뉴스를 보았다.

구니카즈는 금방 잠이 든다. 침대에 들어가 이십 분쯤 지나면 벌써 기분 좋게 잠들어 있다. 아사코는 잠든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본 적 없는 동물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감정을 사랑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 일어나 설거지를 했다. 매일 밤 그렇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구니카즈는 불쾌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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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의 부엌은 조용하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집 안의 다른 장소와는 분명하게 다른 공기가 흐른다고 아사코는 생각한다.

뜨거운 물을 부어 도마를 소독하고, 스테인리스 싱크대를 닦는다. 그리고 구석의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이번 달 생일 축하해.

서른여섯 살 8개월이네.

아사코 언니가 한 달을 더 살아주어서 기뻐.

형부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카드를 다시 한 번 읽는다. 아사코는 남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 부엌에 둔다.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이쿠코도, 다달이 생일을 축하하는 자기 가족의 묘한 습관도, 축하받은 자신조차도.

그것들은 멀고도 그리운 무엇이었다. 과거에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그러나 ‘2번가 집’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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